퇴고과정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형용사와 부사를 솎아낸 듯 문장이 단단하고 건조하다. 최소한의 단어들만을 골라 사람들이 처한 어떤 상황을 보여준 뒤 카버는 뚝, 멈춰버린다. 주인공의 운명을 통제하는 전능한 지은이가 아니라, 그 후로 어찌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한 뒤 입 다물어 버리는 과묵한 남자처럼.
카버의 주인공들은 '생각'하는 대신 '행동'한다. 카버의 무심하고 간결한 말투를 따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정말 별 것 아닌 사소한 몸짓 때문에.
표제작인 ‘대성당’을 먼저 읽으며 움찔하다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으면서는 끝내 울고 말았다. …얼마 전 내가 마신 숭늉 한 컵이 생각났다.
가족을 갑작스레 잃었을 때, 한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다 엉뚱하게도 오랜 친구의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다. 대상을 종잡을 수 없는 분노를 몇 시간 동안이나 게워낸 뒤 무너지듯 쓰러져 버렸다. 일어난 뒤 제 풀에 지쳐 방구석에 축 늘어져 있던 내게 친구가 가만히 다가왔다. 그가 건넨 건 ‘기운 내라’는 위로도, ‘정신 차리라’는 충고도 아닌, 숭늉 한 컵이었다.
구수한 냄새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에 코를 박은 채, 그 온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비천한 마음이 되어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 참혹한 일로 가시 돋혔던 마음이 처음으로 순해질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그런 숭늉 한 컵 같은 이야기다. 줄거리는 아예 언급하지 않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소설가 김연수 씨의 번역도 좋지만 원문도 읽고 싶어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다. 김연수 씨의 ‘옮긴이의 말’을 보니 카버는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가장 아꼈다면서 두 이야기가 살아남는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두 단편 때문에 한밤중에 눈물 흘려본 사람이 나만은 아닐 터이니,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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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대성당 - 그의 문장은 빵집 주인 같아
2008/03/03 10:01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문학동네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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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05 10:13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집이 10여 년 전에 나왔었는데요. 1.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2. 숏컷 3.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가 시리즈였고 이번에 나온 '대성당'은 그것들을 편집한 거 같던데요. 목록을 보니. 아마도 절판되고 이번에 다시 찍어 내나 봅니다.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은 시리즈1. 사랑에...에 수록됐었던 같네요. 저도 여러 단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빵집에 스며드는 빛이 여운으로 오래 남았던...-
산나 2008/01/05 23:07
그랬군요.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이 일치하다니, 기쁩니다. 그땐 제목이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었군요. 어제 아마존에서 찾아볼 때 원제는 'a small, good thing'이었던 것 같아요. 영어가 함축적인건지, 한국어가 뉘앙스가 부족한 건지...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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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 2008/01/05 23:09
^^ 서점에 서서 이 단편 두개만 읽고 오시면 올해 금(禁)소설 신년결심도 얼추 지키시고, 일거양득이 아닐까 싶네요....(서점에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함다.^^
제겐 참 좋았어요. 레블 님께도 따뜻한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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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도둑 2008/01/07 14:30
선배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김인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조만간 우린 모두 다시 만날 겁니다...
참, 잠시 쉬었던 블로깅, 다시 시작했어요. 가끔 들러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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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Soul 2008/03/03 10:00
좋았어요.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요. 숭늉 이야기에서 순간 먹먹해졌어요.
이렇게 좋은 글로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예요.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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