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해가 쨍쨍! Sunny California가 바야흐로 시작되다. 두꺼운 재킷을 벗어던졌다.
계속 남쪽으로 달려 도착한 산타 바바라 Santa Barbara 는 스페인, 멕시코의 숨결이 뒤섞인 예쁜 해안도시다. 깨끗하고 보기좋은 올드 타운에 걸인만 가득해 좀 거시기했지만.
산타 바바라의 미션 mission 이 멋지다는 말만 듣고 무턱대고 언덕에 올랐다. 결론은 미국에서 가본 성당 중 가장 아름다운 곳, 9일간의 여행을 통틀어 부모님이 가장 흡족해하신 곳이었다.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북쪽의 소노마에서 남쪽의 샌디에고까지 21개 미션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미션들을 죽 잇는 101 도로엔 el camino real이라는 표지와 함께 미션을 잇는 길임을 알리는 왼쪽 모양의 등이 군데군데 서 있다. 각 미션들은 대체로 말 타고 하루쯤 걸리는 정도의 거리에 배치돼 있다고 한다. '순례'의 이미지에 이유없이 깜빡 죽는 나로서는, 21개 미션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캘리포니아가 신성한 비밀을 간직한 땅처럼, 이전과 달리 보였다.
제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부모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무엇을 염원하실지는 묻지 않아도 잘 안다. 늘 같은 기도.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신들을 위한 바람은 전혀 없이 오로지 자식들에게로만 향할 간절한 희구... 수십년간 반복되었을 그 무수한 기도의 힘으로 내가 살아왔으리라.
막내 동생과 나는 무슨 예수를 이렇게 섹시하게 조각해놓았냐며 킬킬거렸다. 착 가라앉은 낮은 파스텔톤의 성당 분위기와도 맞지 않게 튀는 조각상이다.
부활한 예수는 근육질의 우람한 사내 모습이다. 비슷한 이미지를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멜 깁슨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무덤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근육질 허벅지는 꼭 터미네이터 같았다. 부활의 해석 중엔 '기쁜 소식' 대신 강한 예수를 통한 '가차없는 심판'도 포함돼 있는 모양이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로스앤젤레스는 몇 년 전 샅샅이 훑은 덕택에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으므로 하루 잠만 자고 샌디에고 San Diego 로 내려갔다.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도시는 샌디에고다. 지중해성 날씨는 LA처럼 좋고, 도시는 LA보다 훨씬 예쁘고 깊다.
미션 앞 회랑만 봐도 그렇다.
산타 바바라 미션의 회랑(위)은 고색창연한 맛이 살아있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조용조용 걸었을 수도사의 발걸음 같은 게 공간에 배어 있다. 반면 샌디에고 미션의 회랑엔 그런 게 없다. 남국의 분위기는 나지만 수도사보다는 원색의 티셔츠를 입은 관광객의 배경으로 더 어울리는 공간이다.
고통 중에 있는 부모님을 위로하기 위해 기획한 여행이었지만, 끝날 무렵엔 위로는커녕 고단함과 걱정 보따리만 어깨에 더 얹어놓은 것 같아 영 마음이 무거웠다.
늘 그렇듯 이번 여행도 내 안의 다른 얼굴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스스로에게조차 낯선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은 때로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인생에 밀착해 살아가려면 당혹스러운 맨얼굴도 감당해야 하리라. 어떠한 환상도 없이...
여행 마지막 날, 샌디에고 미션 베이의 해변에서 말없이 석양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이셨다. "모든 게 다 잘 될거야. 모든 게....."
마치 난생 처음 발설하는 비밀이라도 되는 양. 번번이 사랑을 잃고도 또다시 사랑의 맹세에 모든 걸 거는 맹목의 연인처럼. 아픔을 돌이킬 순 없지만 하늘의 수호천사로부터 약간의 보상을 약속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 단호함에 전염돼 나도 모르게 크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주 먼 훗날 이 여행을 다 잊어 기억조차 못하게 되더라도, 샌디에고 미션 베이의 해변에서 어머니의 얼굴 위에 떠올랐던, 희망의 그 간절한 표정만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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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그니 2008/03/09 21:17
이건 내가 일등!!!!
아 저런 곳에서 한달만이라도....살았으면,
젠장 주말이면 맨 방구석에서 키보드 워리어 하는 나는 몰까요 -_-;; 암튼 부럽고, 또 행복해 보입니다.^^-
산나 2008/03/09 23:52
ㅎㅎㅎ 오늘 '산나 블로그 댓글 달아주는 날'로 정하셨나봐요. 황공무지로소이다~ 어흑~~~. 넘 부러워마십셔..전 일본에서 사시는 당그니님이 부러울 때가 있는 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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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아르 2008/03/11 04:16
바쁜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듯 읽었던 여행기를 오늘 다시 읽어봤습니다. 9일간의 여정이 마치 동행한듯 느껴져 참 좋았습니다.
샌디에고는 제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곳입니다.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여기 가서 살고 싶다고 늘 말을 하지요. 저도 전형적인 미국과는 다른 그 이국(제 삼국이라고 해야할까요?)적 향취가 좋아 언젠가는 한번 살아볼만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네요... "모든게 잘 되기"를 바라면서 댓글을 마칩니다.-
산나 2008/03/11 20:16
샌디에고 참 좋죠? 저도 한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은퇴후 꿈이 꼭 이뤄지길 바랄께요.^^ 시리즈 댓글 달아주신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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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윙 2008/03/15 21:06
잘 읽었습니다. 샌디에고...우리 팀 분들은 샌디에고만 생각하면 부들부들 괴로워해요. 일때문에 출장을 그리로 자주 가거든요. 여행을 하러가면 이렇게 좋은 곳이군요. 저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군요. (회사출장말고욤..-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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