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7 23:30

체실 비치에서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내겐 '올해의 발견'인 작가다. 올 봄 비행기 안에서 그의 소설 '속죄' 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톤먼트' 를 보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몇 달 뒤, 우연히 대학 때 내가 혼자 좋아했던 친구가 번역자인 게 눈에 띄어 '이런 사랑'을 읽었고, 그 뒤로 '체실 비치에서''암스테르담' 을 내처 읽었다.

'체실 비치에서'는 아주 짧으면서 긴 이야기다. 며칠 전 밤에 읽기 시작해 새벽 5시까지 다 읽곤 책장을 덮으며 그만 울어버렸다.
책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은' 사건은 아주 사소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놓쳐버린 기회, 사랑도 모두 젊음의 오만함, 미숙함, 어설픈 자존심, 그런 턱없는 사소함들 때문에 놓쳐버린 것이 아니던가....
누구든 자기 인생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 사람의 모습을 대입해 읽을 수 있는 책.
단, 지나간 일에 대해 아무런 회한이 없는 분, 사랑이든 뭐든 잃어본 적이 없는 분,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스토리, 선명한 감정을 선호하는 분에겐 비추. 이거 뭐 이래, 하는 생각에 책을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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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dangunee.com BlogIcon 당그니 2008/12/18 00:11 address edit & del reply

    읽을 시간이 필요해요 -_-;; 한국에서 사 온 다른 책도 아직 못 읽고 있는 ㅜ.ㅜ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8/12/18 11:50 address edit & del

      저도 못읽은 책 침대 옆에 쌓여 있어요....ㅠ.ㅠ

  2. Favicon of http://dodobing.tistory.com BlogIcon 도도빙 2008/12/18 09:31 address edit & del reply

    부럽네요 ㅡ.ㅡ; 5시에 자도 6시30-7시 사이에는 일어나서 애 챙겨야 하는 저로서는... ㅡㅡ;;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8/12/18 11:51 address edit & del

      5시에 자도 저 역시 7시엔 일어나서 출근준비를 해야 한다는....
      물론 아이돌보는 고단함에 비할 수야 없지요.

  3. Favicon of http://realfactory.net BlogIcon 이승환 2008/12/18 11:06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까지 강추하시다니,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ㅎ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8/12/18 11:51 address edit & del

      음..승환님은 별로 안좋아하실 것같아요.^^
      한 20년쯤 뒤에 읽어보심이~ ^^;

  4. Favicon of http://www.iankwon.com BlogIcon 이안 2008/12/18 13:21 address edit & del reply

    사놓기만 했었는데 읽게 만드시네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8/12/18 20:24 address edit & del

      얼른 보시고 리뷰를 써주심이~^^
      책도 얇아서 금방 뗄 수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elwin.tistory.com BlogIcon 엘윙 2008/12/18 17:54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요즘 통 책을 안읽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마음속이 텅 빈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8/12/18 20:26 address edit & del

      연말이라서 그러신 게 아니구요? ^^
      그나저나 멕시코(? 브라질인가요?)는 언제 가시는지요?

    • Favicon of http://elwin.tistory.com BlogIcon 엘윙 2008/12/18 23:10 address edit & del

      부끄럽게도 -_-올해는 출장운이 없나봐요.
      정말 분한 일이 있었는데, 결국 안가게 됐습니다.
      승환님 취업파티때 뵈요 ^^

  6. 경심 2008/12/21 21:48 address edit & del reply

    전 그래서 아무리 탱탱한 피부가 탐나도 20대로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가끔 그 미숙한 시간들을 몽땅 들어내고 싶다니까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9/01/17 14:12 address edit & del

      저도 마찬가지 ^^

  7. Favicon of http://kinojrnl.net BlogIcon 키노 2009/02/21 17:35 address edit & del reply

    그렇군요. 전에 문학상 수상작 목록을 정리하면서, 제목만 눈에 익었는데, ssana 님 말씀에 꼭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문장이 길고 유려해서 번역하신 분이 힘드셨을 법하네요. ^^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09/02/22 16:31 address edit & del

      번역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물론 원문을 안읽었으니,
      글이 돌부리처럼 걸리느냐 아니냐가 유일한 판단기준이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