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에 해당되는 글 3건
- 2009/02/23 "극적 반전? 마음 속의 질문을 따랐을 뿐"
- 2009/02/22 일요일의 외출
- 2009/02/17 [1]전정욱: 엔지니어에서 전통음식 프랜차이즈 대표로 (7)
[중년의 터닝 포인트-2] 최혜정- 광고인에서 국제NGO 실무자로
Before: 레오버넷코리아 제작이사,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
After: 국제NGO ‘세이브 더 칠드런’ 자원개발부장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저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평화’가 떠올라요. 6살 때 낮잠을 자다 깼는데 부엌에선 엄마가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비 온 뒤 적막하고 깨끗한 마당에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던 풍경. 그게 기억에 선명한 ‘행복’의 이미지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란 새로운 모험과의 조우를 뜻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전부 다르니까 ‘나만의 행복’이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최혜정 부장(48)의 표정은 뭘 더할 수도 없을 만큼 충만해 보였다. W브랜드커넥션 본부장을 지내는 등 22년간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그녀는 2007년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뒤인 2008년 세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고액 연봉과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박봉의 NGO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녀는 “벼락같은 계시로 인생항로를 바꾼 것도 아니고 대안적 삶을 찾은 것도 아니다”면서 “원래 살고 싶었던 방향을 따른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레오버넷 코리아 제작이사였던 그녀는 맥도널드 광고 ‘목숨걸지 맙시다’로 세계 3대 광고제 중 칸 광고제 은사자상, 뉴욕 광고페스티벌 금상을 휩쓸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인터뷰에서도 광고는 “인간의 진실한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NGO를 선택한 이유로 “사람과의 접점에 서 있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7년 전에도 그녀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던 사람 같았다. “원래 가려던 방향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자기 안의 질문을 따라 가기
40대 초반부터 그녀는 “이게 과연 내가 살고 싶은 삶인가”하는 질문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광고업계에서도 물론 성취감을 느꼈지만 본질적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는 또 다른 문제 같았어요. 내가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사는가, 내 속도감으로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질문을 품게 만든 충격적 사건이 2004년에 있었다. 그해 여름 다니던 교회의 대학생들과 함께 한 장애인 교회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였다.
인솔자인 그녀가 방문자를 맞으러 문 앞에 서 있는데 교회 담당자가 오더니 갑자기 “여기 말고 부엌에 가 있는 게 어때요?”하는 거였다.
“내 얼굴이 너무 긴장되고 어두워서 오는 사람들이 불편하겠다나요. 얼떨결에 부엌으로 쫓겨나 수십 명 분의 불고기를 볶으며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좀 지나면 잊을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명상 심리검사 코칭 등 온갖 시도를 해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깨달은 자, 붓다’ ‘링크’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같은 책을 읽으며 다른 시각과 심지를 갖추려 노력했다. “앞으로 20년 더 내 인생을 갖고 뭘 하고 싶은가”를 오래 고민하던 와중에 학창시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치유를 겸한 대안학교를 해보면 좋겠다고도 막연하게 꿈꾸었다.
“회복이 아니라 해독을 위해 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2007년 5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음가는대로 관심사를 따라 혼자 공부하던 도중 우연히 신문에서 희망제작소의 ‘제1회 행복설계 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이 아카데미를 마친 뒤 간사의 우연한 소개로 2008년 5월 ‘세이브 더 칠드런’과 연이 닿게 됐다.
“광고회사를 그만둘 땐 NGO에 가리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대안학교를 꿈꾸며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그녀의 꿈과 크게 동떨어진 곳도 아니었다. 다른 길로 향한 문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모서리에서 열렸다.
● 전환의 때를 어떻게 알 것인가
진로를 바꾸고 싶다고 해도 지금이 좋을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겁이 나거나 생계는 어떻게 하나 등등 모든 경우의 수가 다 떠오르고 그걸 정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죠. 제 경험으론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져요. ‘다음에 뭘 하지?’하는 질문에도 ‘6개월간 찾아보자’같은 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아직 때가 아니라면 “장, 단점 파악 등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고 무보수든 주경야독을 하든 원하는 일에 발을 슬쩍 담가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하지만 그 ‘원하는 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녀는 “뭘 하고 싶은지가 단 번에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요? 처음부터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그리 많을까요?”하고 반문했다.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너듯 연결하면서 살아도 되잖아요. 두서없이 여러 생각이 든다면 조금씩 맛을 보고 아닌 걸 지워나가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뭘 하다가 그만두면 그만큼 인생과 시간의 낭비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언젠가는 경험들이 연결되어 쓰이게 되지요. 전 늘 ‘어디로 가든 크게 보면 내 길이겠지’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내 길 안에서 움직일 뿐이지 내가 갑자기 영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 다른 사람, 다른 집단과 네트워킹하기
광고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그녀는 일부러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약속의 70% 정도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스님 목사 신부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포럼, 커뮤니티, 광고회사 고객으로 모셨던 어른들을 찾아갔다. 무턱대고 “제가 어떻게 보이나요?”하는 질문도 숱하게 던졌다.
“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늘 보는 직장 동료는 같은 정보를 공유한 사람들이어서 별 도움이 안돼요. 다른 클러스터, 다른 시각을 만날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관심사를 좇다보니 말 그대로 “6개월 만에 100명을 알게 되더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처음 그녀의 관심을 끈 분야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련 프로그램이었고 인터넷을 뒤지고 학회지를 구독하고 강연을 찾아가면서 점점 네트워킹을 넓혀 갔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길 위에 서게 되었지만 처음에 희망제작소에 이끌린 것도 이 관심사 때문이었다.
● 계속 성장하기
NGO에서 일하면서 수입은 이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고 출장지는 파리 뉴욕에서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큰 보상을 얻는다고 했다.
10년 쯤 뒤에도 계속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계획이나 결심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미래 아닌가요? 나는 여기서 계속 성장하고 싶어요. 그 마음에 진정성만 있다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 에도 동시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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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게 사는 게 미친 거라면 난 얼마든지 미칠 거예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에이프릴의 말)
친구들은 황당해하면서도 누구나 그렇듯 우정과 시샘이 뒤섞인 반응으로 약간은 부러워했고 약간은 멸시했다. 다 청산하고 떠나겠다는 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정신병원에서 휴가를 나온 미친 사람 밖에 없었다.
하지만 떠나야 할 이유를 들자고 치면 끝도 없듯,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 또한 끝이 없다. 아내의 임신, 승진, 거액 연봉의 제안, 여기서도 파리에서처럼 멋지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주저… 마음 설레던 계획의 포기를 목전에 두고 부부는 반목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이 뭔지를 잘 모른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 아내가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살지 말고 파리에 가서 당신의 본질을 찾자”고 설득할 때 남편은 이렇게 반문했다. “내 본질이 뭔데?”
파리에 가본들 여기나 똑같다는 옆집 남자의 위로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꼭 파리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어요. 방법은 몰라도 어쨌든 그 희망으로 살았어요. 약속되지도 않은 일에 모든 희망을 걸다니…. 하지만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어요. 말 그대로 무의미한 인생일 뿐….”
결국 “떠나지도 못하고 머물 수도 없었던” 그녀의 선택은 끔찍했다.
그들 부부가 꿈꾸던 대로 떠났더라면 행복했을까. 알 수 없다. 선택이 옳은 것과 그른 것 중 하나를 고르는 경우일 때는 아주 드물지 않을까. 대부분의 선택은 어떤 특정한 대안이 다른 것보다 특별히 낫다고 할 수 없는 경우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맞냐 틀리냐 이전에 의지와 상황의 문제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은 어리석었다. 그렇게까지 맞설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은 몰라도 어쨌든 포기할 수 없었던” 그 희망에 사람이 목숨을 걸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 * *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본 다음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했던 곳은 용산이었다.
‘무망한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 하나로 목숨을 잃었던 사람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발길이 그렇게 쏠렸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합동분향소가 있다는 것은 어제 hojai 블로그를 통해 알았다.
지나가는 사람인양 슬쩍 쳐다보기만 할 심산이었는데 상복을 입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 팬 아주머니가 다가와 구속 철거민 석방 촉구 서명에 참여하기를 권했다. 내 옆에서 서명을 하던 아주머니는 서명을 청하던 아주머니에게 “나도 이 근처 살고, 장사하는 사람예요.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는지…. 좌우간 뭔 일이 생겨도 밥은 굶지 마요”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 보니 지나는 행인 중 서명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요란하게 웃으며 지나던 여고생 3명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어 서명을 하고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사라졌다.
분향소의 방명록엔 울분이 가득했다. 부끄럽다는 글도 많았다. 나도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명복을 빕니다”이상으로 어떤 말도 더 적을 수 없었다.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한 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분향소 앞엔 드럼통에 불을 피운 채 나이든 철거민들이 지친 자세로 앉아 있었고, 이들을 큰 길로부터 격리시키듯 닭장차가 바리케이트처럼 그 앞에 줄 지어 서 있었다.
그 자리를 떠나며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의 말은 얼마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으로 곧잘 매체에 인용되던 대목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분께서 인용하셨다던 성경의 한 대목.
“카인아,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
이 질문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추기경님이 고문치사를 했던 안기부 요원만을 꾸짖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부끄러웠다. 그 때와 달리 지금 불감증이 만연한 이유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철수’를 명령받지 않아도 되는 안전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추방당하는 사람들만큼이나 권리에, 주권의 박탈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가 권한을 위임한 국가기관이 야만을 일삼고 이를 우리가 묵과할 때, 힘없는 아벨의 피난처는 이 세상 어디란 말인가.
나는 모르겠다. 꿈쩍도 않고 너무나 완강한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이 무망해보이는 싸움이 어떤 결실을 거둘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기껏 ‘대단히 아름다운’ 수사라는 것을 해놓고도 골자가 ‘우연히 떨어진 화염병’ 때문에 다 죽었다 밖에 없는 검찰의 발표가 참 개소리라는 것만 안다. 그리고 분향소에 붙어있던 말, “저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절규의 절실함 밖에는 모르겠다. 나의 글은 무력하다. 위선과 분열을 견딜 수가 없어 한동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요점 없이 옆길로 새버린 이 포스트를 굳이 올리는 이유는 마음이 있다면 힘을 보탤 방법이 아직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다. 사이버 조문이나 후원을 할 수도 있다. 한 달이 지났어도 여전히 고립무원의 처지인 그들에게 우리가 아직 잊지 않았다고 말해줄 방법은 여전히 있다.
마지막으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해야 할 주제에 다 잊고 용서하자는 철면피한 소리를 추기경님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랍시고 읊어댔다는 어떤 높으신 분께 말해주고 싶다.
“저기에 아직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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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모작’은 이제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년퇴직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 ‘조퇴’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중년도 늘고 있습니다. 35~55세에 인생전환을 이뤄낸 평범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는 [중년의 터닝 포인트]를 주 1회 연재합니다.
• Before: 자동차 엔지니어
• After: 미국 FDA 승인 받은 전통음식 프랜차이즈 (주)미당 추어탕 대표
• Age at the turning point: 36
11년 전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전정욱 씨가 1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추어탕 집을 차리려 준비할 때, 하필 외환위기가 시작됐다. 말리던 주변 사람들은 “그것 봐라”는 듯 그를 딱하게 여겼다.
경제상황이 그 때보다 더 힘들다는 2009년. 그는 지금 48개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미당 추어탕의 대표로 성장했다. 2006년엔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 중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식품안전승인을 받고 포장 추어탕을 미국에 판매하고 있다.
전 대표 (47)는 “음식 산업은 결국 신뢰의 산업이고 오너의 마인드가 모든 걸 좌우한다”면서 “정 할 것 없으니 음식점이라도…, 같은 생각으론 100% 망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전환에 성공했을까.
1. 스스로에게도 명분이 서는 일을 찾아야 한다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그는 자동차 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다 97년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추어탕 집을 차렸다.
“직장생활 10년차 쯤 되었을 때, 이 회사에서 내 미래가 어떨까 그려봤어요. 사장이 될 것도 아니고, 언젠가 홀로서기가 불가피하다면 더 나이 들기 전에 하자고 결심했지요.”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에게 명분이 서는 일을 찾고 싶었다. 고민 끝에 “가업을 계승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부모님은 전북 남원에서 3대째 추어탕 집을 해왔다. 이미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그는 명맥이 끊긴 가업을 다시 잇겠다고 결심했다. 단순한 ‘추어탕 집’이 아니라 ‘전통음식 발굴, 브랜드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하며 이게 ‘해야 할 일’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퇴직 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더라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음식점은 손님에게 무조건 맞춰야 하는 직업이거든요. 주인이 잘 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은 의욕적이니까 자신을 낮추지만 떠밀려서 한 사람들은 그걸 못하더라고요. 떠밀려서 하는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 태도의 차이가 모든 걸 결정해요.”
2. 좋은 조력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
음식점이 성공하려면 일류 시설에 일류 주방장을 쓰는 ‘규모의 경제’ 혹은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 자본이 모자란 그는 후자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2년간 주말마다 추어탕의 본고장인 남원에 내려가 요리를 배우고 추어탕 집을 순례했다. 그의 행운은 스승을 잘 만난 것. 부모님 집 주방에서도 일했던 노인에게 ‘맛을 그리는 기술’을 배웠다.
“한식에는 고추장 된장 마늘 등 7대 재료가 있는데 탕을 먹어보고 그 안에 7대 재료 중 무엇이 들어갔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특히 탕은 이미 끓여 동화된 상태라 재료 감별이 어려워요. 스승께 집중적으로 배운 게 이 기술입니다. 간만 볼 줄 알면 요리 80%는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배합을 알고 무엇이 부족한지 맛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탕 요리의 핵심인 열처리도 노인에게 배웠다. 추어탕 집을 순례할 때 어떤 집의 된장 맛이 유난히 강해 이유를 물으면 주인도 대개는 “된장을 한 숟갈 밖에 안 넣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비밀은 열처리에 있었다.
“추어탕에서 된장 맛은 입으로 느끼게 해야지 냄새가 나면 안 되거든요. 추어탕에 된장을 넣어도 냄새가 안 나는 온도가 360도라고 치면 그걸 불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역시 스승께 배운 핵심 기술이죠.”
3.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할 것인가
“저도 깎으려고 궁리를 많이 했어요. 다 내리는데 혼자 올리는 결정을 하기가 쉽겠어요. 하지만 천연재료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소 원가는 7000원이었고, 내 방식을 버리느니 대신 1000원어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직접 빚은 약주, 추어로 만든 전을 서비스하기 시작했지요.”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처음에 하루 20만~30만원이던 매출이 1년 반 만에 하루 250만 원 선으로 늘었다. 차별화를 위해 추어 만두, 어린이 추어 돈가스 등 신규 메뉴도 계속 개발했다.
“업종 선정도 중요합니다. 저는 차별화 전략의 성공이 추어탕집이라 가능했다고 봐요. 김치찌개와 달리 추어탕은 기호식품이고 고객의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 문화이거든요. 입소문이 나면 손님들이 1천원 차이는 무시하고 결국 다시 돌아오시더라고요.”
2005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때도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갔다. 대부분의 프랜차이즈가 본사 물건 공급 수준을 30% 선에서 맞추는 것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18억 원을 들여 공급시설을 짓고 본사 물건을 100% 공급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기술 전수를 해줬는데 다 실패했어요. 조리법만 배우고 맛 관리가 안 되니까 경쟁에서 지는 거죠. 일괄적 품질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장을 짓고 본사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 냉장 상태로 매일 배송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4. 끈질기면 길이 트인다
2006년에 그는 미국 진출로 눈을 돌렸다. 탕 문화가 해외에서도 먹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고 재미교포들도 주요 공략 대상이었다. 포장 추어탕을 대형 콘테이너로 수출하려면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대행업체에 맡겼더니 6개월간 진전이 없었다. 하도 답답해 그는 동시통역사를 구해 매일 밤 FDA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FDA의 요구는 온도별로 제품 영양소가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조사해 제출하라는 것. 식품과학 관련 연구소에 갔더니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해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
“석 달 동안 공장에서 실험하고 거의 매일 FDA에 전화해 설명하면서 ‘식품 가열온도에 따른 영양소 변화’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했더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자료보다 기준을 지키기 위해 공정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이래요. 추어탕을 승인 받고난 뒤 대게탕 시래기국 황태탕도 일사천리로 승인 받았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는 “물건을 콘테이너에 실어놨으니 무작정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 안 되면 말더라도…. 끈질기게 추구하다보면 일이 되는 방식이 다 있더라”고 들려주었다.
그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200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다. 강진 장흥에서 사라져가는 막걸리 초장을 도입해 키조개무침으로 상품화하는 등 전통음식 발굴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제 천직을 찾은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천직? 그런 건 모르겠다. 다만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에도 동시 발행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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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프랜차이즈의 성공신화! 어디까지 믿고 따라가실 건가요?
2009/02/18 15:43
불경기..경제위기..이런 말들이 쉽게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창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죠. 솔직히 사람들의 경험이나 의견을 들어보면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모험을 강행해야 하는 창업 보다는 월급쟁이가 훨씬 안정적으로 돈을 번다고 하죠. 하지만, 눈치를 보면서 직장을 다니거나 월급쟁이 생활이 지겨워지시는 분들은 모아온 묵돈을 이용해 자신만의 업체를 꾸리고 싶어 합니다. 물론, 더욱 많은 돈을 벌고 CEO라는 직함을 얻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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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2009/02/18 13:32
언니.. 저도 터닝을 하긴 하는데 아직 어느쪽으로 튈지 모르겠어요...ㅎㅎ. 터닝하기전에 먼저 한 일년 엎어져서 좀 쉬려구요. 다시 못 일어나면 어떡하죠? 엔지니어에서 추어탕 체인 대표라... 흠.. 뭔가 구체적 꿈이 있어야 무우를 자르던지 호박을 썰던지 할텐데.. 이러다 일년내내 실컷 놀기는커녕 일년 뒤에 먹고 살 걱정하며 지난 10년동안 하던 일 예/복습만하게 되는건 아닌지 몰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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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09/02/18 19:07
우왕~ 신나게 놀아! ^^
다시 못일어나긴...다 일어나게 돼 있어.
1년 놀고와서도 갈팡질팡하는 처지라 뭐 말할 입장은 아니다만...
그냥 텅텅 다 비우고,잔먼지가 다 가라앉고 나면 뭐가 남는지를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1년동안 한국에 올 생각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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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eka58 2009/02/19 19:52
'우수' 지나고, 경칩되기전에 짠`~ 나타나셨네요. 흔히 놀던 물에서 놀아야한다는 통념을 깬 분의 이야기네요, 저 분과 같은 끈기와 근성이 모두에게 필요한 시기죠, 특히나 요즈음의 상황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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