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28 01:56

부러운 사람

".....우리 테이블에는 최근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성도 있었는데 중미의 촌락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간호학교에 막 입학한 이였다. 그녀가 부러웠다. 사회에 대한 기여가 너무 간접적이고 불확실한, 글을 쓰거나 가르치고 법을 업으로 삼고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나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이들에 관해 생각했다.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빗자루 하나라도 만들고 싶다는 평생의 바람에 대해 시를 쓴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나는 떠올렸다.”

-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

 

오랫동안 내팽겨쳐 둔 세 번째 책을 위해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돌아다니고 원고를 쓰는 중이다. 얼마 전에 만났던 한 여성의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말을 다루는 일을 하다가 아주 구체적으로 사람을 돕는 일로 전업하게 된 그가 “땅에 발을 딛고 몸으로 부딪혀 세상을 배우는 구체적인 삶”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그가 얼마나 기쁨에 차 있는지를 말보다 눈빛을 보고서 알았다. 새로 시작한 일을 들려줄 적마다 그의 눈은 유난히 반짝거렸고 덤덤한 표정에도 생기가 돌았다. 번번이 기억의 시계를 되돌려 이미 지나온 과거를 들려달라고 청하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하워드 진의 에세이집에서 읽었던 위의 구절이 떠올랐다. 미국의 실천적 지식인으로 손꼽히던 하워드 진조차 간호학교에 입학하는 젊은 여성을 부러워했다. 추상적 개념을 다루거나 글과 말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회의하며 ‘구체적 삶’을 동경한다.


집에 돌아온 뒤 나는 오래전 밑줄을 그어둔 이 구절 옆에 한 마디를 더 적어놓았다. ‘구체적 삶’이 변화시키는 대상은 다른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고. “타자지향적인 목표와 가치, 연결선이 명확하게 보이는 일을 하게 되면서 나 자신이 달라진 것 같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서다. 스스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낄 만큼 그가 고양된 것은 커다란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도 낮아졌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그의 일이 얼마나 목적을 달성할지도 알 수 없다. 충만함은 그런 데에서 오는 게 아닐 것이다. 다시 하워드 진의 말에서 한 대목.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받는 보상은 미래의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 있다는, 함께 위험을 무릅쓰며 작은 승리를 기뻐하고 가슴 아픈 패배를 참아내는 과정에서 얻는 고양된 느낌이다.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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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tobeortohave BlogIcon 지아 2010/02/28 06:00 address edit & del reply

    구구절절 공감이예요. 언니 새 책은 그 전에 실었던 turning point에 대한 건가 보죠? 아흐... 저도 빨리 turn하고 싶은데 ㅋㅋㅋㅋ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8 22:11 address edit & del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좀 쉬어도 되지 뭐~ 너무 조바심갖지 말고 느긋하게 지내.

  2. lebeka58 2010/03/01 12:19 address edit & del reply

    살면서 깜빡깜빡 잊고 있던 걸 다시금 일깨워주시는 글이네요. 각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다름으로 해서 구체적 삶의 방법이 다르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말과 글의 힘은 정말 크고, 이또한 아무나 하고자 한다해서 할 수 있는건 아니거든요. 그런면에서 전 산나님이 넘 부럽사와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3/03 00:39 address edit & del

      말과 글의 힘에 대해 회의적이라서...레베카님 댓글 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3. Gomy 2010/03/02 16:39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돌아오신 것을 확인하니 제 얼굴에도 아래 동자와 같은 미소가 (물론 그 정도로 귀엽지는 절대 않으나 ^^) 퍼지는군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3/03 00:40 address edit & del

      Gomy님은 언제 돌아오셔서 저도 동자처럼 웃어보는 기회를 갖게 해주실라나요? ^^

  4. 경심 2010/03/03 02:01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가 책 글귀를 옮겨 놓으실 때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늘 다 외우고 계신 걸까, 한 단어나 맥락을 기억하다가 옮겨 놓으시는 걸까. ^^선배가 여기저기 흩어놓은 조각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리운 마음이 듬뿍 일어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3/03 15:22 address edit & del

      '기억력'보다 '망각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내가 그걸 다 외울리가 있니~^^
      막연하게 생각나면 찾아보는 정도야.찾아보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경우가 훨씬 많고.
      그건 그렇고,잘 지내지? 봄에 꼭 만나자.

  5. Favicon of http://elwin.tistory.com BlogIcon 엘윙 2010/03/07 13:12 address edit & del reply

    왠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실체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ㄱ-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3/09 01:38 address edit & del

      헐~뭘 그렇게까지.....^^

2010/02/23 23:36

돌아왔습니다


길게 할 말도 없고, 드릴 설명도 없고... 그저 폐가처럼 썰렁했던 집에 무심한 주인장이 돌아왔다는 민망한 신고를 일본 교토에서 보았던 동자의 웃음으로 대신합니다. 

곧 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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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아 2010/02/24 05:43 address edit & del reply

    언니~~~~ 저 동자의 편안한 표정이 참 좋네요.. 언니도 올 한해 늘 몸과 마음이 평안하길 바래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4 22:44 address edit & del

      고마워 ^^

  2. lebeka58 2010/02/24 08:53 address edit & del reply

    저 미소가 제게로 전염되 기분이 밝아지네요. 재미있는 모습을 포착하신 그 감각, 역시 산나님! 반가와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4 22:51 address edit & del

      레베카님도 잘 지내셨지요? 반갑습니다 ^^

  3. EJ 2010/02/24 11:14 address edit & del reply

    저 미국에서 유학한 마지막 3년동안 왕팬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종종 들르곤 했는데 너무 오래 집을 비우셔서 아주 이사가신줄 알았습니다. ^^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4 22:46 address edit & del

      들를 때마다 실망스러우셨겠어요.-.-;;
      앞으로도 자주 올릴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먼지는 안쌓이게 해보려고요. 감사합니다 ^^

  4. 2010/02/24 13:39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4 22:47 address edit & del

      책이 절판되어 구하기 힘드셨을텐데...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도 궁금하군요.^^

  5. Favicon of http://www.infuture.kr BlogIcon 유정식 2010/02/24 23:43 address edit & del reply

    백만년만의 포스팅이군요. ^^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다 오셨나봅니다. 자주 뵈어요. ^^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4 23:53 address edit & del

      그러게요.백만년만의 댓글에 댓글달기이군요.^^
      뭐 돌아다닌 곳은 별로 없는데 마음이 떠나있어서, 돌아오는데 오래 걸렸어요. 자주 뵈어요 ^^

  6. Favicon of http://zairostyle.com BlogIcon 우기 2010/02/25 01:11 address edit & del reply

    잘돌아오셨네요. 켜켜히 쌓인먼지가 날아갈만큼만 포스팅하시면 될것같네요. 이제 자주와야겠어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5 21:28 address edit & del

      ^^; 그나저나 우기님 홈페이지 참 멋져요. 직접 만드셨나봐요?

  7. Favicon of http://www.ufosun.com BlogIcon UFO 2010/02/26 09:15 address edit & del reply

    책 하나 또 주문해야겠네..
    김*해씨가 드디어 스페인을 혈혈단신 결정한 모양야
    나중에 면담시간 좀 주라...
    날 따뜻해지면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6 21:02 address edit & del

      그러자.연락해라

  8. Favicon of http://twitter.com/dodobing BlogIcon 도도빙 2010/02/28 10:21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셨어요?^^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2/28 22:13 address edit & del

      잘 지내셨지요? 링크가 트위터로 넘어가네요? 블로그보담 트위터에 집중하시는 듯.^^
      전 여전히 트위터는 어리둥절하기만 한 촌뜨기입니다요 -.-;;

  9. Favicon of http://dangunee.com BlogIcon 당그니 2010/03/03 09:09 address edit & del reply

    아. 이게 얼마만입니까. 눈물이 주루룩..성은이 망극;; 쿨럭!

    • Favicon of http://www.bookino.net BlogIcon sanna 2010/03/03 15:24 address edit & del

      저도 쿨럭.....ㅠ.ㅠ
      얼마전 일본여행하면서 당그니님 생각했었어요.
      도쿄에 갔더라면 연락 드렸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