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Turning Point'에 해당되는 글 17건
- 2010/06/25 [계간 1/n] 버스터미널에서 (20)
- 2010/05/23 벌써 1년... (8)
- 2009/06/09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10)
- 2009/05/13 "한 분야 10년 파면, 길이 트입니다" (7)
- 2009/05/06 "내 꿈이 어디갔지?" 돌아와 숲 앞에 서다 (16)
- 2009/04/28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거는가" (14)
- 2009/04/21 "뭐든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아요" (7)
- 2009/04/16 펑크내다.... (27)
- 2009/04/07 "틈새의 문을 열고 나가면, 꿈이 현실이 됩니다" (11)
- 2009/03/31 "공식은 이제 그만! '아트'로 살래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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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로 잡지 한 권을 꾸미는 독특한 계간지 [1/n]의 여름호 주제는 '환승'입니다.
비행기나 버스를 갈아타듯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을 주제로 한 권을 꾸몄는데요. 전체 책의 구성과 디자인이 재미있네요. 각 꼭지 글들도 좋습니다. 방금 전에 손에 든 잡지를 밑줄 그어가며 읽었어요. (위 그림을 클릭하면 인터넷 서점에서 목차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버스 터미널에서'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답니다.
* * * * *
버스 터미널에서
얼마 전 나는 17년 넘게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렸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지만 불안했다. 이 장거리 여행길에, 갈아 탈 버스가 있기나 할까……. 하지만 이대로 더는 가고 싶지 않아서 큰 숨을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탈 버스는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시간 맞춰 내리지 못한 스스로를 한심해 하고 어디로 갈지 궁리하며 터미널 근처를 서성이던 내가 한 일은 다른 환승객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난 1년간 18명의 환승객들을 만났다. 회계사가 요가학원 원장이 되고 광고회사 임원이 요리사가 됐으며 간호사가 소설가가 되고 음반가게 사장이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성공적인 환승의 결과보다 나는 이들 안에서 꿈틀대며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 마음의 씨앗이 궁금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을 전복하고 싶은 열망? 혹은 오래 묵은 꿈을 더 늦기 전에 실현하겠다는 의지?
이전의 삶이 좋기만 하다면 누가 환승을 꿈꾸랴. 한 분야에서 오래 길을 닦아 어른이 되고 나면 젊은 날의 혼란 따위 말끔히 해결하고, 살아가는 일, 아니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서만큼은 도사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기대는 번번이 배신당하며 성인이 되어도 삶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개 나이 마흔쯤 되면 발달심리학자 프레데릭 허드슨의 말처럼 “자신이 원했던 것은 갖지 못했고, 현재 가진 것은 바라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각은 여러 계기로 찾아온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선 자각이 위기의식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았다. 일 중독자였던 회계사는 어느 날 아침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일시적 마비 증세를 겪은 뒤 “일과 돈 말고 내 인생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승진을 거듭했으나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이 궁했던 외국계 회사 사장에겐 “삶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는 자각이 깃들었고, 생계 때문에 음반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은 “인생에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또 어떤 이는 IMF 외환위기 때 한 팀이 몽땅 해고되는 사태를 지켜보며 단단해보였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겪었고, 10년 위 회사 선배들을 지켜보며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구석에 밀쳐두었던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올렸다. 위기가 자기 삶에서 비롯되었건 외부에서 왔건 이들의 마음속에 터 잡기 시작한 질문은 “내가 지금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내 속도감으로 살아가고 있나” 하는 거였다.
그런 질문을 품는다고 누구나 ‘환승’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대개의 사람들은 체념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환승을 선택하는 이들이 상세한 지도와 시간표를 갖고 있을 거라 여기며 부러워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환승객들 중 정밀하게 짜인 계획표대로 움직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NGO 활동가가 된 전직 광고회사 임원은 “회복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단 회사부터 그만두었는데, ‘그 때가 그만둘 때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내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고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조바심이 들면 아직 때가 아닌 거다. 반면 때가 되면 질문이 단순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서이건, 뭔가를 꿈꾸는 열망 때문이건, 언젠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떤 지향이 ‘일시적 충동’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지속적으로 나를 부르면, 더 이상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때를 만나게 된다. 그 때에 내린 선택으로 인해 나중에 ‘미친 짓을 했다’고 후회하게 되더라도, 그렇게 만난 삶은 그 후회까지 포함해 한 번은 살아야만 하는 삶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이들은 ‘내가 어느 때 가장 행복했던지’를 오래 생각했고, 자신의 강점과 연결되지 않는 판타지를 꿈으로 착각하지 않으려 주변의 도움을 청했으며, 온전히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하프타임을 갖고 미래의 꿈을 기록했다. 어디로 가는지 뚜렷하지 않지만 ‘일단 이만큼만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큰 점프 대신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러다보면 별개인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어 뒤돌아보면 어느새 하나의 길이 만들어져 있곤 했다.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농부가 된 이는 내게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으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들려주었다. 누군가 뭔가를 이루었다면 행동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이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단 뛰어들어 경험하고 성찰하고 다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내가 환승객들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어쩌면 환승을 선택할 때 필요한 필수품은 상세한 노선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서로 이어지고 통합되어 결국은 ‘내 길’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믿음뿐일지도 몰랐다.
이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나는 곧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신화의 힘』에서 들려준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가자는 대로 그 부름을 따라 살면,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눈빛을 달라지게 하는 조그만 직관을 따라 가다보면,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을 만나게 되고,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따라다니며 문을 열어줄 거라던 말.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 중 상당수는 일부러 좇은 게 아닌데도 마치 계획이나 한 듯 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지거나 도움을 받는 경험을 겪었다.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보트 제작을 배우고 돌아오니 보트 쇼가 열리고 요트계류장이 속속 들어서는 식이다. 물론 그저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반대로 악운이 겹치고 학비 대줄 돈이 없어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라던 캠벨의 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궤도였다.
손에 지도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환승을 선택하면서 남들 따라 ‘되는 쪽’에 걸어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성배를 찾아서』의 오래된 프랑스판 문헌은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가장 어둡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지점을 골라 숲으로 들어갔다.” 신화에서 남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곧잘 길을 잃는다. 공연장 대표가 된 전직 변호사의 말마따나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거는가. 고작 그런 사람이 되자고 정작 나를 잊고 살 순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대신 나만의 길을 고르고, 자신의 괴물과 싸우고 자신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에 도전할 수 있다. 내가 만난 환승객들에게 인생 전환은 지금의 자기로부터 멀어지거나 다른 사람이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만난 18명 중 이전보다 수입이 확실히 늘어난 사람은 4명뿐이다. 세속적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순 없겠지만 삶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었다. 그들로부터 나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기쁨에 대해 들었고 먼 길을 돌아 미리 계획된 듯한 소명을 만났다는 충만함도 엿보았다. 반면 또 다시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자기반성, 가끔 환승을 후회한다는 고백도 들었다. 그러나 현재 상태가 어떻든 단 한 번의 전환으로 삶이 완성되리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승객들은 미래의 불투명함을 불안하게 여기는 대신 우연에 열린 태도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곧게 뻗은 직선형 계단 대신 빙빙 도는 나선형 계단에 올라 거듭되는 부침(浮沈)을 긍정하면서도 점점 나아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하는 냉소를 거부하고 계속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성인의 삶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다. 환승하는 우리들은 계속 자라고 싶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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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식 2010/06/26 12:50
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저는 어디서 환승하게 될까, 궁금해지네요. ^^ 환승을 하다가 제 짐을 놓치진 않을까 아직은 염려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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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ing 2010/06/26 21:01
안녕하세요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환승'이 두려웠고, 막상 그 상황에 놓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후련했었지요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 기억을 찾아 한발씩 내딛고 있네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챠오!!(아자아자 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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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2010/06/28 14:02
언니 전 아직 터닝은 못하고 예전에 하던 일과 같은 쪽으로 파트타임 일자리 구했어요 ㅋ 일년 반동안 실컷 놀았으니까 앞으로 3년은 놀면서 일하면서 애 뒷바라지하고.. 3년후에 터닝하려구요. 그때까지 체력이나 잘 다져놔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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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eka58 2010/07/02 17:36
86쪽 읽을 차례예요. 물론 산나님 글은 젤루 먼저 다시 읽었구요. 잡지 제목이 재미있어요. 앞으로 n이 어떤 내용으루 이어질지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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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한잔 2010/11/01 00:11
방금 '내 인생이다'라는 책을 다 읽었습니다. 어제, 오늘 이틀 동안.
저 또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갈등하고 있기에 여기에 실린 글들이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나는 '왜? 그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일까' 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이 '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해 이맘 때, 유난히 죽음의 소식이 잇따랐다. 모두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계속 생기냐"며 불안한 안부를 주고 받을 만큼....병마와 싸워 이겨주기를 바랐던 장영희 교수부터, 친구였던 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씨, 그리고 지난 해 오늘,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까지...
눈에 핏발이 선 채 밤을 꼬박 새운 날도 부지기수고,
울음을 터뜨리며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는 바람에 꼬리뼈가 부러지는 황당한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인생의 방향을 트는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일련의 죽음들이 던진 질문의 영향도 컸다.
맥락은 모두 달랐지만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이들은,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었던 질문과 대면하게 했다.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이것이 네가 원하던 삶이냐고.
1년 뒤.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하고 있는가.
......
부끄럽고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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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 2010/05/24 14:28
저도 4월 말과 5월 초에 갑작스럽게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는 길에, 보내고 오는 길에 느꼈던 먹먹함 속에는 그런 의문들이 무섭도록 잔잔하게 깔려 있더라구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들이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모든 죽음은 그런 의문을 던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건 어찌 되었든 간에, 집요하고 생생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질문 앞에서, 너무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째야할지 모르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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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10/05/25 02:03
충격이 크셨겠어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건 저 역시 여전하지만,질문을 피하지 말고 마주보는 수밖에...
미련해서 그런지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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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13> 정유정 씨-간호사에서 소설가로
Before: 간호사
After: 소설가
Age at the turning point: 35
# 80년 5월, 광주에 공수부대가 들어오던 날이었다. 방 10개가 주르륵 붙어있던 한옥에서 하숙을 하던 대학생과 어른들은 출정식이라도 하듯 함께 모여 밥을 먹고, 한 명 뿐이던 여고생에게 “집 잘 보라”고 당부하더니 모두 굳은 얼굴로 떠났다.
밤새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던 여고생은 대학생이 묵던 옆방에 들어가 책을 하나 골랐다. 재미없는 책을 보면 잠이 올까 싶어 고른 책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 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는 모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총소리가 그쳐 있었다. 어른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쳐둔 이불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니 새벽이었다. 깊은 정적에 휩싸인 새벽녘의 거리를 바라보던 여고생에게서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5년 6개월간 간호사로, 9년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직으로 일한 뒤 35살 때인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설가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고 물으니 그는 “생존 투쟁 때문”이라며 씩 웃었다.
‘의사 딸’을 소망했던 그의 엄마는 2년 더 다니는 의대 교육과정에 맞춘다는 생각으로 6살 난 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전남 함평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학교 대표 글쓰기 선수였지만 어머니는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희곡을 쓰다 속절없이 요절한 어머니의 오빠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반항도 못하고, 광주로 유학을 와서도 공부 안하고 어영부영하다 간호대에 들어갔어요. 그 때도 친구들 글쓰기 숙제를 대신 해주면서 언젠가는 내 글을 써야지, 하고 열병처럼 끙끙 앓았지요.”
간호사가 된 뒤 문학공부를 해볼 요량이었지만 이번엔 모진 운명이 그의 ‘삶을 침몰’시켰다.
“제가 22살이 되던 해에 엄마가 암에 걸리시는 바람에 3년 반 동안 간병을 했어요. 제 직장인 병원 중환자실에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엔 동생 3명의 학비를 대야 하는 임무가 남았지요. 20대 땐 ‘살아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밤에 혼자 습작을 한답시고 끼적거리다가 '내 인생은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신이 나를 20대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절대로 안갈 겁니다.”
어린 나이에 버거웠을 부양의 임무를 모두 마친 뒤 29살 때 결혼을 하면서 그는 남편에게 “집을 사면 직장을 그만두고 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받아두었다고 한다. 35살 때 집을 산 지 두 달 만에 그는 사표를 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기대” 때문에 신이 났다.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글을 쓰고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나면 오후 늦게 “머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썼다. 저녁이면 산에 가거나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을 쳤다.
그러나 공모전에 잇따라 떨어지다 보니 “나는 너무 하찮은 개구리”라는 절망감이 기대의 자리를 대신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과대망상이 아닐까’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며 온갖 공모전에 글을 보내고 떨어지고 몸져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쓰는 과정을 반복하기를 7년 째.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응모한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 문학상에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가 당선됐다.
“벼랑 끝에서 드디어 구원받은 심정”이었다니 이제 편안하게 ‘꽃길’을 걸어도 되련만, 시상식장에서 만난 소설가 서영은의 충고는 그를 다시 가시밭길로 몰아냈다.
“저더러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하시더라고요. 안주하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성인 문학에 도전해보라는 격려이기도 했고요.”
책의 ‘작가의 말’에서 그는 소설을 쓰게 만든 질문이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다고 썼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다던 20대, 세상의 거절과 모욕을 견디면서 보낸 30대 초반, 운명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느꼈던 그 시절,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던 그를 바라보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됐다. 소설을 쓰게 만든 질문에 필사적으로 글에 매달리며 자신의 삶으로 답해온 저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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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지저깨비의 생각
2009/06/27 14:47
간호사에서 소설가로 변신하여 7년만에,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에 이어,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책이다. 책머리에 “분투하는 청춘들에게 바친다”하였는데, 고루한 일상에서 활기찬 소설을 읽고 싶어서 구입했다. 내 작은 새가슴이 뛰기나 할까… 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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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 2009/06/10 10:08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격정의 20대를 보내고 있는 저로선 힘이 되네요.
많이 돌아왔지만 '꿈'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 오신 모습이 멋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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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eka58 2009/06/15 09:21
잘 될건란 막연한 희망이 번번이 현실의 벽에 부짖어 깨질 때, 정말 자존감이 무너지는거 마인드 콘트롤 안되더라구요. 근데 정유정작가님은 인생이 거는 수많은 딴지를 어쩜 씩씩하게 넘어
Winner가 되셨을까 ... 감동이네요~~ -
Playing 2009/06/21 18:01
안녕하세요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동적이네요~ 저도 다시는 돌아가기 싫었던, 그러나 마음만은 너무나 따뜻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힘든 시기가 지나고 나면 점점 그 시기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요새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작가님처럼 꿈을 향해 달려가다 어머니가 아프시고, 동생들 뒷바라지하고, 내집도 장만하기위해 정신없이 살아셨을 때가 어찌보면 가족들을 위해 힘 쏟을 수 있던 황금의 시대가 아니였을까요 ^^
아직 매우 어린 저(82년생)에게 황금의 시대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공존했던 학창시절이였던 거 같네요. 그럼 즐거운 주말 잘 마무리 지으세요 ~!!-
sanna 2009/06/22 12:57
정유정 작가님도, 원체 '행복한가'같은 질문은 잘 안하시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글을 쓰기 전인 30대 초반이라고 하시더라구요.
뒷바라지 끝내고 내 집마련을 위해 정신없이 살 때..
전 '지금'이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처음엔 의외라고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나고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왜 이해가 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 것같아요.(먼 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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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12> 이인식 씨- 대기업 상무에서 과학칼럼니스트로
Before: 대성그룹 상무이사
After: 과학칼럼니스트
Age at the turning point: 46
‘평생직장 시대’에 42살에 큰 기업체 상무가 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 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칼럼니스트인 이인식 씨(64)를 이 시리즈의 인터뷰 대상으로 떠올린 이유는 그래서였다. 금성반도체(현 LG 정보통신)에서 최연소 부장이 되었고 대성그룹 상무이사를 지낸 그는 중년의 절정인 46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다. 인생 2모작, 3모작이 낯설지 않은 요즘에도 쉽지 않을 결단이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지난 주말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두 번 놀랐다. 크고 멋진 아파트는 ‘글쟁이’의 삶은 곤궁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렸다. 그의 서재에 들어서면서 다시 놀랐다. 널찍한 책상과 빽빽한 서가를 기대했으나 너무 낡아 무늬목이 너덜거릴 지경이 되어버린 작은 책상이 눈에 띄었다. 그의 아내가 옆에서 “총각 때부터 쓰던 책상”이라고 들려주었다.
‘왜 컴퓨터를 안 쓰느냐’고 묻자 그는 “컴퓨터를 안 쓰는 게 아니라 워드 프로그램을 안 쓰는 것”이라고 정정해줬다. 인터넷 검색도 하고 메일도 쓰지만, 펜으로 글을 쓰는 게 너무 익숙해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작인 472페이지짜리 책 ‘지식의 대융합’도 그렇게 썼다. 워드로 이리저리 문장을 옮기고 조합하는 편집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겐 거의 ‘미션 임파서블’의 경지다.
● “결국은 사람이 재산이에요”
그는 중년이 될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가난 때문에 늘 ‘생존’이 목표였다. 대학 4년 내리 입주가정교사를 했고 졸업할 때도 취직이 급했다. 금성반도체에 입사한 뒤 정신없이 달려 8년 만에 부장이 되고 이후 일진금속을 거쳐 대성그룹에서 87년 상무이사가 되고 보니 42살이었다.
“돈은 남 못지않게 벌었지만 참 허망했어요. 내 인생이 회사원으로 끝나나…, 한숨만 나왔지요.”
글쓰기는 그의 은밀한 꿈이다. 그의 첫 책은 금성 반도체에 다닐 때인 75년 사보에 연재한 꽁트 12개를 묶어 펴낸 소설집 ‘환상 귀향’이었다. 생활에 치여 꿈이 시들해질 무렵, 어쩌다 연이 닿아 잡지 ‘컴퓨터 월드’의 기획을 알음알음 돕기 시작했다. 미국 과학 잡지를 매달 10여권씩 받아 읽으며 기사 기획을 돕다 보니 직접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 ‘하이테크 혁명’과 ‘사람과 컴퓨터’다.
잡지 일을 돕고 글을 쓰다보니 제대로 된 과학 잡지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91년 가을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까지 쏟아 넣어 잡지를 만들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잡지를 두 번이나 만들었어요. 결국 94년 여름에 완전히 망했는데, 월급 줄 돈이 없어 직원들이 컴퓨터를 들고 가는 걸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 했어요. 하는 수 없이 아들은 군대에 보내고…, 그야말로 밑바닥이었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이제 드라마틱한 반전이 시작될 차례’라고 기대했다. 웬걸, 극적 반전은 없었다. 미련하다 싶을 만큼 우직한 전진만 있었을 뿐이다.
92년 2월 ‘사람과 컴퓨터’가 발간되고 두 달 뒤 시사월간지에 과학칼럼을 연재하면서부터 그의 책과 칼럼을 본 출판사, 매체의 글 요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과학칼럼니스트가 드문 시절이라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월간지->주간지->일간지로 글이 실리는 매체 폭이 확대됐고 잡지와 출판사의 기획을 도와주며 돈을 벌었다. 외환위기가 닥친 97년엔 연재도 다 끊겨 자다가 가위에 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의 절망감 역시 그는 글로 달랬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인간관계 덕분이에요. 인생 전환도 인간관계가 좋아야만 가능합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싸가지 없는 사람’은 전환도 어려워요.”
그가 과학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까치 출판사 박종만 사장의 소개 덕분이었다. 김영사 박은주 사장으로부터는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그가 ‘바닥에 처한’ 94년 추석 무렵, 박 사장은 ‘사람과 컴퓨터’ 책만 보고 그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하더니 추석 직전 직원을 보내 “선생님은 국보”라면서 100만원을 건네기도 했다.
“결국은 사람이 재산입니다. 돈보다 사람예요. 일감이 들어오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요. 저 역시 판단착오로 몇 번 신뢰를 그르치고 뼈아프게 반성한 적도 있지만, 일단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제가 만나는 사람의 인간적 삶에 동참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한 분야 10년 파면 길이 트입니다”
96년 월간지 ‘과학동아’에 성에 대한 연재를 시작할 때도 그는 2년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고시원에 출퇴근하면서 공부하고 글을 썼다. 다음엔 어디로 갈지 모호할 때에도 그는 늘 책 속에서 길을 발견했다.
“컴퓨터 인공지능을 공부하다보니 뇌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뇌를 공부하다보니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지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심사가 확장된 것이죠. 억지로 분야를 넓힌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책 속에 답이 있고, 한 분야를 10년 파면 길이 열립니다.”
18년 전, 회사를 그만둘 때 그도 두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큰 조직의 소모품 대신 작아도 ‘내 것’을 생산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보다 컸다. “별로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별로 없다”는 배짱도 한몫했다.
18년 후인 지금, ‘내 것’을 만들고 싶다던 그의 꿈은 실현된 셈이다. 자기 이름 석자로 브랜드가 되었다. 요즘 그의 수입은 인세 원고료 강연료 기획료 등 4가지 일로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점점 강연의 비중이 늘어난다. 14일에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서 특강이 예정돼 있다.
“조직 안과 밖의 가장 큰 차이는 안정적인 수입인데, 때론 과감한 포기도 필요해요. 돈도 안정적으로 벌고, ‘내 것’ 생산도 하고 그렇게 너무 욕심내면 안돼요. 친구들이 연봉 1억 받을 때 나는 쪼들렸지만, 지금 나는 일하는데, 연봉 1억 받던 친구들은 은퇴하고 다 놉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듯 결국은 세상이 공평한 거거든요. 그러니 좋아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내공을 쌓으면 언젠가 한번은 찬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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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2009/05/14 00:31
멋져요~~ 문외한인 저도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일 것 같네요. 이 분야에 관심만(!) 많은 저에겐 솔깃한 얘기네요. 저도 인지과학-뇌구조-마음 이쪽으로 공부해보고 싶었는데. 꼭 나중에 글을 쓰게 되지 않더라도 관심있는 분야들을 파다보면 또 그 관심이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쪽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고 그렇게 배워나가는 과정 자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인데. ㅎㅎ 개인적으로 숲 생태연구가하고 이분의 터닝포인트가 가장 끌림돠. 십년 파면 길이 보인다.. 흠 지난 십년동안 삽질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이젠 그 삽질에 꽤 익숙해졌다고나 할까요. 적성에 맞지 않아서 따라가기 힘들었고 그래서 살아 남으려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지만 늘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었죠. 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일을 정말 즐기는 사람에겐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쟎아요. 정말 맞는 말이라는. ㅋ 근데 (원래 타고 나지 않았어도) 얼마나 그 일에 익숙하고 잘하느냐에 따라 시간에 지남에 따라 적성이 생기기도 하는 듯 해요. 이 훈련된 적성이 앞으로 할일에 어떤 거름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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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09/05/15 23:51
마자. 좋아하는 일을 하면 금상첨화이지만,
하던 일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더라구.
훈련된 적성이 네게 값진 거름이 될 것이야. 암, 그렇구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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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09/05/15 23:55
운전도 안하고,휴대전화도 안쓰셔 ^^
휴대전화 안쓰게 된 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데,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쓰면 쫌 거시기해서 안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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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11> 김용규씨-벤처기업CEO에서 숲생태 전문가로
Before: 벤처기업 CEO
After: 숲생태 전문가, 행복숲 공동체 대표, 농부
Age at the turning point: 39
그의 숲에 가는 길은 멀고 깊었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 충북 괴산 행 버스를 타고 내려간 뒤 다시 택시를 타고 숲으로 향했다. 산길에 접어들자 택시 기사는 계속 “어제 세차했는데…”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듯한 비포장 길 앞에서 딱 멈추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이런 차로는 못 가요.”
별 수 없이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산 속으로 한참 걷자 산 위쪽 꽤 높은 지대에 나무 집이 보였다. 저런 곳에서 살면 세상 소음이야 들리지 않겠지만…, 그 적요가 부럽다기보다 ‘무섭지 않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웬걸, 갑자기 개 두 마리가 컹컹 짖으며 적막을 깨뜨렸고 그 뒤로 여자 아이가 웃으며 달려 나왔다. 김용규 씨(42)가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늦은 아침 식사를 방금 마친 듯 그의 아내는 달그락 달그락 접시를 씻고 있었다. 산 속에서 막 기지개를 켠 가족의 일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집이 들어선 곳은 말 그대로 그의 숲이다. 그는 벤처회사 CEO를 하다 3년 전 그만 둔 뒤 뜻을 같이 하는 사람 5명과 함께 이곳 숲 7만5000평을 샀다. 앞으로 이 숲을 공동체, 생태 교육의 장소, 창작의 산실로 쓸 계획이며 그가 먼저 지난해 숲 속에 집을 지어 자리를 잡았다. 그는 숲에서 배운 것들을 최근 ‘숲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대도시에서 시골로, 사무실에서 숲 속으로. 간단치 않은 전환이다. 그 씨앗이 뿌려진 건 언제였을까. 변화는 곧잘 낯선 손님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도 5년 전쯤 한창 회사를 운영할 때 우연히 ‘메신저’를 만났다고 했다.
“한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였어요. 인터뷰 도중 기자가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히는 거예요. 한 3분가량 멍하니 있었어요. 내 꿈이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아, 내가 꿈을 잃어버렸구나’하고 자각하는 계기가 됐지요.”
당시는 그가 다니던 이동통신회사가 1999년 벤처 붐을 타고 설립한 벤처 회사에서 그가 CEO로 일하던 때였다. 가족도 미국에 보내놓고 회사를 키우려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사람 만나는 게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도 그러려니 하던 그에게 갑자기 던져진 질문, “꿈이 뭐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주말만 되면 MTB를 타고 남산 오르내리고 산에 다니면서 ‘내 꿈이 어디 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때 유학을 다녀와 학자가 되겠노라 꿈꾸던 그 청년은 어디로 갔는가. 당장의 답은 구해지지 않았지만, 이전에 잘 몰랐던 숲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 소나무는 어떻게 바위를 뚫고 자랄 수 있었는지, 질경이 풀은 왜 하필 하고많은 땅 중 척박한 곳에서 자라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혼자 숲과 관련한 책을 찾아 읽을 때만 해도 그게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꿈을 고민하다가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나를 찾아 떠나는 꿈 여행’에도 참여했다. 그를 눈여겨본 구 소장이 이메일 뉴스레터인 ‘마음을 나누는 편지’ 필진으로 참여하라고 제안했고, 그는 산에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식물 자연을 주제로 칼럼을 썼다. 내친 김에 숲 연구소 전문가 과정도 수료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숲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며 그에게도 꿈 하나가 생겼다. “지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숲을 만들고 싶다”는 꿈.
“상상해보세요. 이 숲에서 생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나무를 하나씩 심는 거예요. 자신만의 소망나무를 심고 거기에 자기의 꿈을 적은 메모를 붙여요. 이게 쌓이면 이곳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스토리텔링 포레스트 (Storytelling Forest)’가 되는 거예요. 제가 계속 나무를 보살피고 ‘당신 나무에 꽃이 피었어요’ 이런 소식을 홈페이지에서 업데이트해주는 거죠. 멋지지 않아요?”
반대하는 아내를 수목원을 함께 다니며 설득한 끝에 2006년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팔아 괴산에 내려왔다. 농사도 짓고 지난해 여름엔 넉 달간 집을 직접 지었다. 집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재료는 일체 쓰지 말자는 원칙을 정하고 시멘트를 쓰지 않은 채 밭 흙을 다져 기둥을 세우고 목재로 작은 집을 지었다.
직접 집을 짓다니. 그것도 마흔이 될 때까지 사무실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져 “집을 어떻게 지어요?”하고 묻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머리로만 생각하니까 그게 엄청 어려워 보이는 거예요. 집을 어떻게 짓긴요. 그냥 짓는 거죠. 집 잘 짓는 사람 모셔서 자문도 구하고요. 배우고 걷는 게 아니라, 걸어가면서 배우는 거잖아요.”
숲에 들어온 뒤 그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과잉친절 베풀기를 그만두었고 거침이 없이 당당해졌다. 세상 흐름에 휘둘리지 않으며 혼자 있으면 “우주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어 충만해진다고 했다.
아직 다 현실화되지 않은 그의 계획을 듣다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봤는데 결국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공포는 없을까?
“왜 없겠어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계속 있어요. 그걸 끌어안고 가는 거죠. 되레 두려움은 죽을 때까지 동행하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부터 쉬워지죠. 또 이 길이 내 길인지 아닌지는 길을 잃어보기 전엔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는 지난해까지 양평에서 생애설계를 돕는 교육 프로그램인 ‘씨앗에서 숲으로’라는 프로그램을 3회 운영했는데 올해부터는 괴산의 숲으로 옮겨와 진행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20여명이 거쳐 간 ‘씨앗에서 숲으로’는 내 안의 씨앗을 발견해 숲의 일원인 나무로 성장하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심리학자와 함께 운영하는 프로그램인데 저는 숲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숲에 가면 사람들에게 당신을 닮은 나무를 찾아 그 아래 서보라고 해요. 전부 제각각이에요. 어떤 사람은 뒤틀린 나무, 어떤 사람은 가시 많은 나무를 택하죠.”
그는 자기자신을 닮은 나무로 흔히들 ‘엄나무’라고 부르는 음나무를 꼽았다. 잔가지에 억센 가시가 잔뜩 들어찬 음나무처럼 그도 20~30대엔 가시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숲을 만난 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이 가시를 버리는 것”을 보았고, 변화의 힘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여전히 그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의 가족은 숲에서 가까운 증평 군에 산다. 당장 초등학교 5학년인 딸 아이 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저축해둔 돈을 다 쓰면 어떻게 할 것인지…, 낯선 이의 무례한 질문에도 범상하게 “계속 노력할 것이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던 그가 “여기는 제가 숙연해지는 장소”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저 높은 곳 바위 위에 심하게 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의 성장배경을 들려주던 그의 말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처럼 들렸다.
“잘 보세요. 저기 느티나무의 뿌리가 바위를 끌어안은 모양새로 뻗어 있잖아요. 어느 날 바위 위에 떨어진 느티나무 씨앗이 점점 자라면서 제 살 길을 저렇게 찾은 거예요. 소나무처럼 바위를 뚫을 힘이 없는 느티나무 뿌리가 선택한 방법은 바위를 옆으로 끌어안는 것이었어요. 저렇게 바위를 안으면서 자신의 뒤로 신갈나무가 자랄 공간까지 만들어줬잖아요. 어려운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내는 삶처럼 보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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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09/05/16 16:12
너도 비슷한 꿈을 갖고 있는 모양이구나. 부러운 걸 보니^^
뭘하고싶은지 잘 모르면 자기가 누굴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지 잘 관찰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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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ing 2009/05/16 06:32
안녕하세요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을 지.. 짐작하는 것조차 쉽지 않네요
힘든 환경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야 말로 생명의 신비인 거 같네요
오히려 생명공학도인 저보다 더 깊이있게 자연의 신비를 이해하신 분들이 계신 걸 보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네요(조금 힘들다는 핑계로 쉬엄쉬엄하는 거 같아 되려 놀래기도하고.. 그래도 나도 할수 있다는 힘도 없는 거 같습니다)어째든 수많은 분들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생명의 젖줄인 비가 오는 의미있는 주말보내세요 ~ _~-
sanna 2009/05/16 16:15
생명공학 공부하시는군요.멋지십니다~
가끔 댓글 남기시는 거 보면서,'길'과 관련한 고민이 있으신가보다 짐작하고 있어요.
Playing 말씀대로 '힘든 환경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생명의 신비가 누군들 비켜가겠습니까.
우리 모두 생명인데요.
뭐든 힘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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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on 2009/06/26 22:12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저도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앞두고 있는데 도전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쉐아르님 블로그에서 책 소개 봤어요. 저도 나중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앞으로 종종 방문할께요. 감사합니다.^^-
sanna 2009/06/27 00:51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생의 터닝포인트 앞두고 있긴 저도 마찬가지인 듯..^^;
누구나 언젠가는 한번 겪어야 하는 일이겠지요.
인터뷰를 빌미로 터닝포인트를 지난 사람들 만나면서 저도 많이 배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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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포인트]<10> 윤학 씨- 변호사에서 공연장 대표 겸 잡지 발행인으로
변호사 일을 접었지만 면허를 반납한 것은 아니니 여전히 변호사인 건 마찬가지다. 그런 그의 인생 전환도 절박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화이트홀 윤학 대표(52)를 만나러 가던 날도 ‘돈이 많은데 뭔들 못하겠나’하는 삐딱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물어보았다. “여전히 변호사인데, 인생을 걸고 방향을 바꾸셨다고 할 순 없지요?”
그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인생을 걸고? 아, 너무 비장하시네! 하하하~, 전 여전히 그대로예요. 예전엔 한 사람만 변호했을 뿐이고, 지금은 문화를 통해 다수를 변호하니 그게 좀 달라진 점이랄까.”
커다랗게 웃느라 금세 실눈이 되는 그의 웃음엔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강조했다. “고향 뒷산에서 내려다본 바다 수면 위에 부서지던 햇볕”을 묘사하면서 금세 그리운 표정이 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처음에 삐딱했던 마음도 스르르 풀렸다. 열정은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다.
그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공연장 화이트홀, 갤러리 화이트의 대표이자 월간 ‘가톨릭 다이제스트’와 ‘월간 독자’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너무 힘들고 바빠 도저히 병행할 수가 없어” 지난해 여름 변호사 업무를 완전히 정리한 뒤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12년 전 그가 인수하기 전, 고작 500부 발행되던 ‘가톨릭 다이제스트’는 지금 정기구독 독자만 6만여 명이다. 종교를 뛰어넘은 교양지를 표방하면서 2007년 창간한 ‘월간 독자’는 매달 3만부 가량 나온다. 아직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해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손해 보는 짓”이다. 화이트홀, 갤러리 화이트가 들어선 5층짜리 빌딩이 그의 소유라서 임대료로 적자를 메우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도 발행규모를 축소하기는커녕 ‘월간 독자’ 영문판 발행을 궁리 중이다.
“법률문서를 쓸 때는 ‘내가 이것 잘 써서 뭐하나’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었어요. 내가 글을 쓰면 판사 한 명만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훨씬 재미있어요.”
그는 갑자기 일어나면서 “1000만 원짜리 카드 한번 보실래요?” 하더니 한 수녀님이 ‘월간 독자’를 읽고난 소감을 적어 보낸 감사 카드를 들고 와 보여주었다.
“제가 ‘월간 독자’ 만들면서 한 달에 2000만 원 넘게 써서 없애는 형편이지만 이런 카드 한 장 받으면 아, 정말 가슴이 뛰어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도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품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를 쓰며 살았다. 오랜 세월 그에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외면할 수 없던 가치였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너무 밝은 달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다 보니 그날따라 달이 유난히 밝더라고요. 하필 그날 새 사건을 수임하면서 받은 수표가 주머니 여기저기에 가득 들어있었어요. 달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내가 지금 뭐하면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사무치는 거예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결국 내가 찾는 세계는 돈이나 권력, 명예가 지배하는 이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그 때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속해 있던 세계에서 그도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전남 신안 흑산도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 졸업 후 대도시 명문 고등학교 입시를 쳤다가 떨어졌다. 대학입시에도 떨어져 두 번 재수를 했고 사법시험에는 세 번 연거푸 떨어졌다. 변호사를 할 땐 ‘네가 꼭 필요하다’는 말에 넘어가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후기 모집으로 들어간 고등학교에 다닐 때, 5월 어느 날 교정에 성모성월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때의 기분을 그는 “전 우주가 내게로 달려오는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클래식의 세계, 그때까지 몰랐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 때 처음 알았다.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겪은 공개적인 실패도 그를 키워주었다. 그동안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허무맹랑하게 들렸고, ‘내 길’을 생각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속해있던 세계에서 최상위의 명분은 ‘정의’였지만 그것 역시 나의 잘못은 덮어둔 채 남의 약점만 물고 늘어지는 불공정 게임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어요. 마흔 넘기며 칭찬도 하루아침에 비난으로 변한다는 것도 체득했지요.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겁니까. 고작 그런 사람이 되자고 정작 나를 잊고 살 수는 없지요. 그래서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사람이 서로 진심으로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내고 싶고요.”
임대료 추가 수입이 꽤 나올만한 공간에 공연장과 갤러리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에서라고 했다. “좋은 글과 음악, 미술만큼 사람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많은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정말로 뜬금없이 물어봤다. “그런데, 돈을 그렇게 다 써버리면 자녀들에겐 뭘 물려주시려고요?”
“돈요? 자기가 직접 벌지 않은 돈은 쥐약이에요. 그걸 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줍니까? 그보다는 좋은 생각을 심어주는 게 더 중요하지요. 나는 아이들에게도 뭐가 됐든 글을 쓰라고 늘 이야기해요. 글을 쓰면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남이 좋다는 것에 휩쓸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가슴속 언어를 알아듣는 귀를 키우라고 말이죠. 그렇게만 할 줄 알면 자기 꿈은 스스로 실현할 수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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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테라의 느낌
2009/04/29 10:18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평가에 왜 내 인생을 거는가'' — 그녀, 가로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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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eka58 2009/04/29 10:44
ㅎㅎ ~ 저도 산나님처럼 '삐딱한 생각'을 잠시 했었죠, 근데 우리 주변을 보면 더 많은 부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마이다스손을 갈망하며 끝없는 집착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 진짜 많거든요. 그런면에서 보면 윤학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크죠, 음~ 얼마전부터 저도 '내게 있는 달란트는 뭘까? '하고 고민(?) 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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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09/05/02 01:45
'달란트'. 성경의 그 '달란트'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
1달란트 그냥 갖고 있다가 그마저 빼앗긴 종의 이야기를 처음 읽을 땐,
그 주인 참 가혹하다, 생각했었는데,
안젤름 그륀 신부님 해석을 듣고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기 인생을 파묻은 꼴이 아니냐고 해석하시더군요.
1달란트 마저 잃을까봐 두려워 자기 인생을 파묻어선 안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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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er_cake 2009/04/30 00:56
그런데 요즘 쓰시는 글을 보면 탐사/조사 능력이 21세기 초반보다 엄청 늘었어요.. 비결이 뭔가요. 여유? 하여간 글빨로는 editor in chief 떼어 논 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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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ing 2009/05/05 09:25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아직 어린 분(학생)들에게 용기를 심어줄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번의 실패로 모든 걸 잃는 게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저에게도요 ~ _~ -
UFO 2009/05/28 11:36
자신의 신념을..
깜끔한 의지를 행동화했다는데...
놀랍고 경의를 표할만한 분인 듯...
우린 머릿속으로만 정의,가치를 그릴 뿐...
흔적을 못남기는데..
이 분은 만나진 못했지만...글은 거의 읽는데...
그런 부분에서 존경..
[중년의 터닝포인트]<9> 최해숙씨- 디자이너에서 소믈리에로
Before: 인테리어 소재 디자이너
After: 소믈리에
Age at the turning point: 35
나이가 들면 사람은 잘 안변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최해숙 씨(43)는 인생의 행로를 바꾼 뒤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로 ‘이전과 달라진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을 꼽았다.
안정감 있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인상인데, 그는 예전엔 안 그랬다며 손사래를 쳤다.
“늘 스스로를 끈기가 없고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해왔어요. 내가 강하거나 악착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길을 바꿔보니 내게 강한 면이 있더라구요. 육체적으로 힘든 일처럼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상상하던 일을 해냈다는 충족감도 커요.”
그에게 인생 전환은 ‘지금까지 속해있던 상자 밖으로 나가는 일’이었다. 두렵고 불안했지만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고, 낯선 세계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지내다 보니 이번엔 달라진 자기 자신이 보이더라고 했다.
LG화학에서 인테리어 소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35살에 길을 바꿔 이탈리아 유학을 통해 소믈리에로 변신했다. 현재 건국대 와인학 석사과정 겸임교수, 와인나라 아카데미 강사로 일하며 소믈리에를 꿈꾸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만약 길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열의 없이 일을 하면서 ‘이것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을 텐데…’ 하며 답답해하고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똑같이 바빠도 어떤 일은 힘을 소진시키는가 하면, 또 어떤 일은 되레 에너지 공급원이 된다. 그에게 전환 이후의 세계는 후자처럼 보였다.
● 하나의 기회가 새로운 기회를 낳고
대기업에 다니던 10년 전쯤, 그는 늘 ‘내 것’과 ‘창의적인 일’에 목이 말랐다.
전문직이었지만 실제로는 차별화할만한 기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는 일이 시장, 자재의 트렌드에 제한을 많이 받아 말이 디자이너지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외환위기 때 여자 선배들이 줄줄이 그만두는 것을 보고 ‘내 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도 커졌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은데 그게 뭔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좀 막막했어요. 그래도 답답하니까 그냥 모호하게 디자인과 관련된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바람이 딴 데서 불어오듯’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2000년, 잡지에서 일하던 아는 이가 요리 코디네이터를 해달라고 부탁해온 것.
“그저 디자이너니까 이것도 잘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부탁했던 모양이에요. 재미있겠다는 생각 하나로 시작해서 몇 달 독학하며 준비해봤는데,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찾던 게 바로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요.”
요리와 미(美)를 결합하는 일에 매료된 그는 내친 김에 퇴근 이후 이탈리아 요리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2001년 회사를 그만둔 뒤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입학했다.
요리를 배우면서 와인의 세계에도 눈을 떴다. 요리 학교를 졸업한 뒤 요리사로 일하면서 소믈리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요리사로 일하던 소도시 캄피오네 디탈리아는 스위스 안의 이탈리아령. 이탈리아 북부 코모 주의 소믈리에 학교에 가려면 편도 3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그 길을 1년간 1주일에 두 번씩 다니면서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고 스위스 레스토랑에서 6개월간 소믈리에로 일한 뒤 귀국했다.
결국 요리 코디네이터에 매료돼 요리사가 되었고 지금은 소믈리에로 일한다. 이전에 한 번도 ‘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그의 삶이 된 것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가 새로운 기회를 낳고, 그렇게 우연의 여지를 열어두고 사는 게 재미있잖느냐”고 말했다.
“어떤 일을 하든 저는 3년 단위로 끊어 생각해요. 예를 들면 10년 뒤에 나는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은 제게 너무 커요. 3년, 그리고 그 안에서 기간을 더 잘게 쪼개어 생각하면 구체적인 목표가 서고,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또 다른 조건이 형성되고 하는 거잖아요. 인생을 미리 어떻게 계획하겠어요. 엄청난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 해보고 후회하자
인생 전환을 주제로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에게도 마치 계획이나 된 듯 시기가 딱딱 맞았다. 미리 예견하고 준비해서 그리 된 게 아니라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처음에 회사 그만두고 요리 유학 간다니까 주변에서 이상하게 쳐다봤어요. 하고 많은 일 중 왜 하필 요리를 배우냐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에서 어찌나 걱정들을 하던지…. 우리 엄마만 해도 딸이 요리 공부하러 갔다고는 말씀을 못하시고 디자인 공부하러 유학 갔다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이탈리아에서 1년 반을 지낸 뒤 한국에 잠깐 왔을 땐 그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가 달라졌다. 왜 그런가 했더니 ‘대장금’ 영향이라고들 했다. 와인을 배우고 다시 돌아오니 이번엔 웰빙 트렌드를 타고 와인 붐이 불었다.
“시기가 우연히 맞았을 뿐 전략적으로 좇은 건 아니에요. 저는 남들이 많이 하는 일엔 관심이 별로 안 생겨요. 남이 별 관심 없거나 ‘그건 좀 빠르지 않아?’할 때 슬슬 마음이 동하기 시작하지요.”
독자적인 판단으로 길을 열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처음에 고민을 시작할 때는 남들에게 귀찮을 정도로 “내가 뭘 잘 할 것 같은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친구들 중엔 ‘넌 요리를 잘하니까 그런 건 어때?’했던 사람도 있었고 성격이 외향적이니 사람 대하는 일을 하라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 말을 들을 땐 서로 연결이 잘 안되는 일이라 그냥 한 귀로 흘렸는데, 소믈리에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는 걸 감안하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요. 어떨 땐 주변 사람들이 더 나를 잘 보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늘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그는 ‘내 것’과 ‘창의적인 일’을 갈망하던 꿈을 이룬 것일까. 그는 절반 이상은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요리와 와인, 여행이 결합되는 지점에서 사업을 해보는 게 그의 목표다. 소믈리에 선생으로 일하는 요즘에도 손이 굳을까봐 계속 집에서 디저트를 만든다.
처음에 "저처럼 저질러도 크게 잘못되지 않더라고 들려주면, 전환을 꿈꾸기만 하고 실행을 못하는 사람들도 기운은 나겠네요"하면서 인터뷰 요청을 수락했던 그는 '저지를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뭐든 해보고 나서 후회하는 게 나아요. 안 해보면 미련이 쌓이기도 하고, 해봐야 내가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를 알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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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뭐든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
2009/04/22 01:40
살다보면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연애든, 사업이든, 만남이든,스카웃제의든, 작가 제의든. 문제는 그 기회라는 쪽지를 집어드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다. 그 쪽지가 공수표인지 로또인지는 집어봐야만 안다. 때때로 독배일 수도 있다. 인생에서 아주 치명적인...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새벽 2시에 베란다에 가서 담배를 입에 댈 수도 있을 것이고, 평소에 친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만나자고 해서 이런저런 조언을 들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곰곰히 몇번이고 자기가..
마감시간 안 지키면 죽는 줄 알고 살아온 게 어언 십여 년인데….
난생 처음으로 마감을 어겼습니다.
그저께 [중년의 터닝포인트] 인터뷰 시리즈 한 회를 빠뜨렸습니다. ㅠ.ㅠ
블로그에 연재하고 인터넷 뉴스로 잠깐 떴다 사라지는 시리즈라서 별로 보는 사람이 없긴 합니다만,
어쨌건 이 시리즈 봐주시는 몇몇 분들께는 죄송….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제 뜻대로 하는 시리즈이다 보니
느닷없이 몰려온 일의 쓰나미에 치여 그만 펑크가 나버렸네요.
전 누가 ‘쪼아대지’ 않으면 한없이 게을러지는 타율적 인간이라는 자각과 함께,
난생 처음 마감을 펑크 낸 충격에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펑크 내도 안 죽는 구나….하는 놀라움 ^^;)
중년에 길을 바꾼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조지프 캠벨이 ‘신화의 힘’에서 인용한 트리스탄의 염원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트리스탄의 말이라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 하겠다. 내 세상을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제가 만난 사람들이 터닝 포인트를 돌 수 있었던 동력 역시 ‘내 것’ ‘내 인생’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아닐까 싶네요.
그 소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없던 용기도 내게 되나 봅니다. 중복이 되어 다 쓰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그들이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은 “용기”였습니다.
용기…라고 적고 나니, 언젠가 제 친구가 편식이 심한 아들에게 “시금치를 먹는 것도 용기”라고 했다던 말이 생각나는 군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오늘 시도해본 ‘사소한 용기’는 평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던 사람에게 직설적 비판을 퍼붓는 대신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애를 써본 일입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포용력이라곤 거의 없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이미 빠진 삼천포로 퐁당~ ^^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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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2009/04/17 05:36
데드라인에 죽고 살던 지난 십여년... 혼자 애 키우면서 외국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그러면서 혹시라도 응급상황이 벌어져 데드라인 못 맞출까봐 늘 데드라인 일주일전까지는 일을 마칠 수 있게 계산하며 하루 16시간씩 뛰었던 기억이 ㅠ.ㅠ 최근 몇년간은 내가 24/7으로 구르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무반 여유반으로 떨어지는 프로젝트 튕겨준적도 있었지만요 ㅎㅎ.언니는 정말 이십여년 가까이 늘 마감에 맞춰 일을 해오셨겠네요. 대단해요. 난생 처음 어긴 마감이라.. 추카해요!!! 뭐든 시작이 어렵다니까요~~(퍽! 응? 이게 아닌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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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2009/04/17 16:59
한 회가 빠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역시 펑크가 나긴 났었군요. 트리스탄이 한 말이나 되새겨보면서 터닝포인트 읽은 셈을 쳐야 겠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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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eka58 2009/04/18 13:25
'난생 처음 마감을 어겼습니다' 란 말씀에 충격을 받았어요, 전직장에서의 저의 행적 땜시찔끔 했네요, 물론 산나님의 기사마감과는 좀 다르지만요.. 하여간 반성 무지 했어요(?)
인터넷 켜고싶은 맘이 들게 하는게 "그녀 가로 지르다' 라면?? ㅋㅋ! 세상과의 좋은 만남의 네트워크란 생각이어요.-
sanna 2009/04/21 22:48
lebeka58님의 전직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군요.
lebeka58님 댓글을 읽으니 더 자주 써야 한다는 반성과 함께
안에 뭐 든게 있어야 더 자주 쓰지, 하는 자책이 교차합니다. 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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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윙 2009/04/19 18:17
마감을 처음 어기셨다니..아마 두번째부턴 충격이 덜하실겁니다.으흐흐흐.
10여년간 마감을 지키셨다니 그것이 제겐 충격입니다. 위의 레베카님과 비슷한 심정..-ㅅ--
sanna 2009/04/21 22:51
오늘도 머리에 김이 날 정도로 정신이 없다보니, 에라이, 또 쓰지말까 하는 유혹이 모락모락....-.-;;;
역쉬 한번 저지르면 그 뒤부텀 쉬워지는 듯...
(근데 이거 사무실후배들이 보고 따라하면 안되는데..-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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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uit 2009/04/19 22:45
아하하하 모범생이 그런 일을 하시다니..
펑크나도 아무일 없다는 큰 교훈 배우셨다니 의미있는 펑크네요.
이일로 산나님 터닝포인트가 당겨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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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꽃 2009/04/25 23:18
김호님 블로그을 가끔 들르는데 물결 타고 우연히 따라왔어요. 마음이 따스한 글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서른 네살에 멀쩡한 회사 나와 바람 같이 물 같이 살다보니 공감되는 글들이 많네요. 감사합니다. 가끔 들려 읽고 가겠습니다. 왠지 펑크도 해볼만 한데요. ^^ - Sharon 노윤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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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 2009/04/28 21:31
앗, 인터뷰후보 리스트에 올려야 하겠군요.^^
인터뷰 대상자를 '서른다섯이후 전환'이라고 기준을 정해두었는데,
노윤경님 때문에 은근슬쩍 한살 내려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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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도둑 2009/05/14 08:59
요즘 뭐 하시나 잠깐 둘러보고 간다는 것이 그만 터닝포인트 시리즈를 몽땅 읽고 말았네요. 참 재미있고 유익한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저에겐 많은 용기도 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중 '펑크...'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터닝포인트를 결행한 사람들은 '내 것' '내 인생'에 대한 강렬한 소망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오히려 내 것, 내 인생만을 추구한 삶에서 무력해져서 터닝을 결행했을 것라는 생각...그렇다고 찾는 것이 '진정한 내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중년의 터닝포인트는 내 것만을 추구하다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이 아닐까요? 내 것만을 추구하다 망쳐놓은 관계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내 것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요? ..뭐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모쪼록 강령하시옵기를...
[중년의 터닝포인트] <8> 최준영 씨- SADI 교수에서 보트 제작자로
Before: SADI (삼성 아트&디자인 인스티튜트) 교수
After: 보트 빌더
Age at the turning point: 37
갑자기 순간이동을 통해 다른 시, 공간에 들어서는 듯했다.
번잡한 대학로 한 복판에 시침을 뚝 떼고 서 있는 30여년 된 낡은 주택. 지하 공방엔 미완성의 배들이 목재의 맨살을 드러내고 누운 채 허공에 떠있는 완성된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조로 된 2층의 사무실에 걸린 카약 두 척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렵했다.
“죽은 나무에 정성을 들여 물고기로 만들었더니 다시 살아서 바다를 헤엄치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멋지잖아요. 배를 만드는 일엔 그런 쾌감이 있어요.”
최준영 씨(41)가 나지막하게 말할 때, 나는 은밀하게 꿈꾸는 연금술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반듯하게 켜놓은 죽은 목재에 비틀고 휘는 고통을 가해 생명을 불어넣어 바다로 돌려보내는 꿈.
어릴 때부터 그는 부모를 따라 해수욕장에 놀러가서도 물놀이 대신 근처 포구에서 배 구경을 즐겼다. 그에게 배는 물고기였다. 작은 배는 꽁치, 큰 배는 고래였다. ‘물고기’를 만드는 일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이 될 거라고 어렴풋하게 예감했다. 그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약간의 우회로를 걸어야 했지만.
● ‘물고기’를 만들 운명을 좇아서
삼성의 디자이너를 거쳐 이노디자인 그래픽 총괄이사, SADI(삼성 아트&디자인 인스티튜트) 교수로 일하던 그는 2005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보트 빌더(Boat Builder)로 전향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살던 대학로 주택에 ‘올리버 보트’를 열고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며 주문 제작을 하고 있다. ‘항로 전환’이 궁금해 찾아 왔다고 하자 그는 “내가 방향을 확 틀었다고 할 수도 없는데…”하면서 당혹스러워 했다.
“전 어릴 때부터 종이에 디자인을 했고, 커서는 전자제품을 디자인했고, 지금은 주머니에 안 들어가는 물건을 디자인하는 차이 밖에 없어요. ‘업(業)’을 넓혀 왔을 뿐이지요.”
어릴 적부터의 매혹을 잊지 못한 그는 97년 삼성에 입사할 때에도 “마흔 전엔 나와서 배를 만들어야지” 생각했다고 한다. 일찌감치 ‘터닝 포인트’를 점찍어둔 셈이다. 혼자서 꿈꾸다 제 풀에 시들해질 법도 하건만, 그에겐 준비를 결심하게 만든 만남이 있었다.
96년 그가 런던의 광고회사에서 잠깐 일할 때였다. 우연히 예순이 넘은 원로 파트너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네가 꿈꾸는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면 몇 살 때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마흔’이라는 대답이 나왔는데, 그 분이 ‘그러면 10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하라’고 조언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열 살 이전을 빼고 생각해도 첫 직장을 갖기까지 15년 넘게 준비하는데 두 번째 인생을 준비 없이 맞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 제겐 행운이죠.”
한국에 돌아와 직장에 다니면서도 혼자 계속 목선 제작 관련 자료를 모으고 습작을 거듭했다. 언제 쓰일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만들어둔 자료 앨범이 나중에 티켓이 됐다. 2005년 산업자원부가 모집한 ‘차세대 디자인 리더’에 그의 선박 디자인이 선정된 것. 주저 없이 사표를 내고 산자부의 지원을 받아 미국 워싱턴 주의 노스웨스트 보트 빌딩 스쿨 (School of Northwest wooden boat building)로 떠났다. 37살 때의 일이었다.
● 오래 기다려온 보이지 않는 손
오래 꿈꿔온 길에 마침내 들어섰을 땐 어떤 기분일까. 정작 그는 “별 감흥이 없다”고 한다.
“뭔가 결단할 때는 스스로 대단한 용기라도 낸 양 생각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아, 그때 내가 그냥 운이 좋았구나’하고 깨닫게 되잖아요. 마찬가지죠. 터닝 포인트 자체는 사건일 수 있지만 그 뒤에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운명 같은 길을 좇아가면서도 불안한 건 여전했다. 아내와 가족 모두 그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괜히 혼자서 ‘내가 이래도 되나’하는 고민을 끌어안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저축해놓은 돈과 시간을 계산해가며 ‘이 정도 총알이면 얼마를 살겠구나’ 하고 막막해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이지 않는 손이 도와주는 듯한 느낌이 계속 들더라고 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2006년 10월 한국에 돌아와 “배를 만들자”는 생각 이외에 아무 계획 없이 작업장을 열었는데 해양레저시설, 마리나(요트계류장)가 속속 들어서고 2008년 경기도가 제1회 보트 쇼를 열었다. “준비운동 마치고 나니 갑자기 대회 일정이 잡히듯” 그가 일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계속 생겼다.
그의 주요 수입원은 카약 제작이지만 사실 카약은 그의 주 전공 분야가 아니다.
미국에서 배 만드는 일을 배울 때 저녁 시간이 아까워 마침 근처에 살던 전설적인 카약 빌더에게 카약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카약을 계속 만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세일 보트, 파워 보트를 만들고 있는데, 우연한 방식으로 일이 풀렸다.
“작업장이 대학로에 있다보니까 카페인 줄 잘못 알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 중에 몇 명이 제가 만들어놓은 카약을 보고 감탄하더니 어떤 사람이 주문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한두 대씩 팔리다보니 어느새 수입원이 되어버렸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이 떠올랐다. 천복을 따라 살면 창세 때부터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길을 만나게 되고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따라다니며 문을 열어줄 거라던….
그에게 이 말을 들려주자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까지는 모르겠고 다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어요. 누군가 어떤 꿈을 갖고 있다면 그걸 계속 꿈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객관화해서 생각해보면 틈새가 있을 것이고, 그 틈새의 문을 열고 나가면 꿈이 자기 현실이 될 수 있어요.”
틈새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다고?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 한두 개를 버리면 결정이 쉬워진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버리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닌 부모님, 가족 이외에 중요한 것인 월급봉투를 버리고 난 뒤 그에게도 길이 열렸다. 그는 “소중한 것을 못 버리고 전부 다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배도 만들고 예전처럼 안정성도 추구하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가치 있는 ‘생물’로서의 배
그는 선박학교를 열기 위해 지방교육청 한 곳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며 부지 확보까지 마쳐놓았다고 한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9월 선박학교의 문을 연다.
배를 잘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손재주일까. 그가 고개를 저으며 “큰 선을 보는 눈”이라고 단언했다.
“전체를 보고 선을 그릴 수 있는 눈이 가장 중요해요. 선을 그리는 눈을 키우려면 논리력이 있어야 해요. 엉뚱할지 몰라도 저는 제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면 논리적 사고가 안 되고, 논리적 사고가 어려우면 선을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는 게 불가능하죠. 논리적인 사고와 그의 구현이 보트 빌더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는 “고급 목조 연안여객선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면서 “가치 있는 ‘생물’로서의 배를 만들고 사람이 ‘짐’으로 배를 타는 게 아니라 배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에게도 잘 묻지 않던 질문을 그에게 뜬금없이 던져보았다. 요즘 행복하신가요?
“글쎄요. 행복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어요. 다만, 날마다 그날 하다 만 작업을 꿈꾸면서 잠자리에 들고, 목재를 이렇게 잘라 저렇게 붙이고 하는 작업을 마저 하고 싶어서 눈이 떠져요. 그걸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전 행복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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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ng 2009/04/08 12:50
여기저기 점으로 존재하던 분들이 네 글로 연결돼 커다란 그림이 되어가는 중인 것 같아....마지막에 고개 들어 전체를 보는 순간, 너마저도 아~~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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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2009/04/08 16:48
Turning Point의 글들은 정말 하나같이 왜 이리 품질이 높은 건지..산나님의 다른 글들이 못하다는 말은 아니고요..^^ 암튼 오늘도 훌륭한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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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 2009/04/09 18:23
배가 너무 이쁘다...^^ 전 내용도 내용이지만 첫번째 사진 뒷편 벽에 공구들 정돈된거 보고 감동~~아마 이런 식으로 차곡차곡 준비하셨겠죠? 정교한 삶의 설계도를 가진 사람은 남들 눈에 비치는 것만큼 자신을 낯설게 받아들이거나 색다른 감흥을 느끼지않고도 한발씩 나아갈 수 있는 건가. 앞의 분들과는 또다른 색깔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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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ing 2009/04/18 09:17
안녕하세요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어제와 똑같이 행동하면서 내일이 달라지길 바라는 저에게
좋은 룰모델이 나타난 거 같아서 마음이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런데 논리적인 말하기와 글쓰기를 강조하시는 거 보니 제자들의 성장이 벌써 눈에 보이네요
[중년의 터닝 포인트]<7> 심바루 씨-외국계 회사 사장에서 종합예술인으로
Before: 사이베이스365 동북아시아 사장
After: 종합예술인
Age at the turning point: 46
심준보 또는 에릭심 또는 심바루 씨(48). 그를 만났을 땐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삶 자체가 무대”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쏟아놓은 말들이 너무 솔직한데다 그가 설명해준 자신의 행보도 희한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그가 속내를 기록해둔 싸이 홈피를 보고서야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하겠다. (심바루씨, 죄송.....^^;)
AT&T, 워너 브러더스, 노텔, 노키아 등 외국계 회사에서 줄곧 일해 온 그는 2007년 사이베이스365 동북아시아 사장을 마지막으로 20년간의 직장생활을 청산한 뒤 자칭 ‘종합예술인’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11월 배우 출신 미술작가인 강리나 씨(45)와 함께 ‘외계인 출입금지’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가졌고, ‘봉춘홍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다니고 있으며, 강리나, 뮤지컬배우 김선경 씨와 함께 ‘지구방위대’를 만들어 환경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기획 중이다.
외국계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누릴 만큼 누려봤다”는 그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 ‘성공’과 ‘풍요’는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재미있고, 특이하고, 용감하게” 사는 게 삶의 목적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는 ‘재미’있고 ‘특이’하고 ‘용기’있는 심바루 씨였다.
● ‘가짜인 삶’에서 벗어나기
자신의 과거를 그는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오죽하면 인터뷰 도중에 ‘아, 왜 그러세요’하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설명해준 이력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부유한 집 아들로 10대 때부터 ‘날라리’였고, 1981년 미달된 외국어대 영어과에 운 좋게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문무대 입소 훈련 도중 “문제의식도 없는데 그냥 친구들이 맞는 게 화가 나서” 인권 유린성 훈련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두 달 뒤 징계퇴학을 당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TV오락프로그램인 ‘영11’에 개그맨으로 출연하고 장발에 흰색 디스코 바지를 입고 싸돌아다니던 그를 보고, 어느 날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고 한다.
“넌 나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미국 뉴저지 주립대에 유학을 가게 됐다. ‘에릭심’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돌아온 뒤 AT&T 한국지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외국계 회사에 다니며 ‘수직상승인생’을 살았다.
“조직생활도 싫고 적성에 맞질 않았지만 돈이 좋아서 참고”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늘 “내 삶은 가짜”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고급 차에 고급 양복을 입고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렇게 살던 스스로를 어찌나 경멸했던지 그는 “난 상류인 척 위장하고 쾌락을 좇던 쓰레기였다”고까지 말했다.
왜 진작 방향을 바꾸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조적으로 "돈이 좋아서"라고 말했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큰아들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큰아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안심할 수준이 될 때까지"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자폐아에겐 한국이 힘든 사회”여서 2005년 그의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그는 2년간 매일 전화로 아내를 설득한 끝에 2007년 11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만두겠다고 노래를 불렀건만 정작 46살의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떠나는 건 그에게도 겁나는 일이었다.
“그만두기 직전, 원형탈모가 5군데나 생겼어요. 머리에 주사를 맞는 치료를 받는데 처음엔 너무 아파도 맞고 나니 견딜만하더라고요. 그만두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했죠. 지금은 두렵지만 저지르고 나면 견딜만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결심할 수 있었지요.”
회사를 그만둔 뒤 처음 두 달간은 후회막심이었다고 한다.
“비서도 없고, 기사도 없고, 그야말로 ‘노바디’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늘 대접받고 살아서 사람들이 원래 그렇게 친절한 줄 알았는데 나와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세상 참 터프하더군요.”
요리사가 되려고 캐나다에서 요리를 배우면서도 내면에서 들끓던 표현의 욕구가 가라앉지 않았다.
노키아에 다닐 때도 그는 3년간 주말마다 이태원 게이클럽에서 DJ로 일했고 틈틈이 영화 단역으로도 출연했다. ‘스캔들-남녀상열지사’에선 중국인 신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선 게이 구둣방 주인 역을 맡았다. ‘다세포소녀’에서 맡은 변태 역할은 “최고의 연기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잘려버렸다”고 한다.
2005년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간 뒤에는 분당에 프렌치 레스토랑인 ‘살롱 드 춘자’를 열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겼지만 ‘게이 필’이 나는 인테리어를 직접 하면서 너무 즐거웠다”고 한다.
‘요리사’로만 살기엔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아내에게 재산을 다 넘기고 “3년만 군대에 다녀올게”하고 약속한 뒤 2008년 9월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지금은 아버지와 둘이서 지내며 아내가 한달에 30만원씩 보내주는 용돈으로 산다. 고급 양복 대신 헌옷 수거함에서 주운 예비군복을 입고, 한때 푹 빠졌던 BMW 오토바이 대신 스쿠터를 탄다.
“주말엔 가끔 바지 위에 치마를 입는다”고 해서 내가 폭소를 터뜨리자 그는 한술 더 떠 “성남 모란시장에서 산 털신이 치마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줄 아느냐”고 자랑했다. 내가 황당해하는 것처럼 보였던지 그가 혼잣말처럼 “남들은 다 꿀꿀하다고 하는데 난 왜 행복하지”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에는 피곤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더 피곤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서 얼마나 좋은데요. 난 웃기는 게 좋아요. 큰아들의 장애 때문에 집안이 어두워지지 않게 하려고 집에서도 늘 웃고 까부는 게 버릇이 됐어요. 이 세상에 장난을 걸면서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 공식 대신 ‘아트’로 살리라
그가 강리나, 김선경과 함께 만든 ‘지구방위대’는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사용, 많이 걷기 등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환경보호를 주제로 전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는 공연에 쓸 돈을 벌기 위해 한 통신회사에 투자했고 캐나다에서 생수를 수입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소득의 10%를 공연에 쓸 계획이며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환경보호를 위한 비영리 활동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삶의 목적이 ‘재미’라고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사소한 일 하나도 그는 남들과 똑같은 걸 못 견딘다. ‘심바루’라는 예명은 ‘똑바루 살자’에서 따왔고, 명함이라면서 ‘심바루, 배우, 종합예술인’이라고 판 도장을 꾹 찍은 재생용지조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넸다. 밴드의 이름을 지을 때도 가장 촌스러운 세 글자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 ‘봉’ ‘춘’ ‘홍’이 각각 떠올라 그걸로 작명했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든 난 아티스트예요. 환경을 주제로, 요리와 공연, 미술을 키워드로 삼아 작업할 겁니다. 지금까진 공식에 맞춰 살아왔어요. 능력 있는 남자, 예쁜 여자를 선호하는 것도 번식의 본능 때문이라고들 하잖아요? 생존과 번식, 그 공식은 이제 나한테서는 끝났어요. 그 숙제는 다 했으니 이제 뭐든 마음 가는 대로, ‘아트’로 살래요!”
"근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하면서 묻지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던 끝에 그가 선언하듯 '공식 대신 아트'를 강조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자유롭지 않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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