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들은 것'에 해당되는 글 17건
- 2012/02/05 This I Believe (2)
- 2011/12/03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2)
- 2011/11/06 좋은 나라 (4)
- 2011/09/19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0/12/08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07/19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5/23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11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3/20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13 일상의 낯선 풍경 (23)
지하철에서 자주 듣던 포드캐스팅 중 'This I Believe'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삶의 믿음,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 등을 에세이로 써서 읽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걸 들은 지는 1년쯤 됐다.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순전히 영어 공부용으로 고른 거였다. 전생에 영어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영어를 잘 못하면 괴로운 일이 자꾸 생기는 바람에 여러 방식의 영어 공부를 하게 됐는데 그 중 하나가 출퇴근 시간에 포스캐스팅 듣기였다.
그래봤자 자발성 부족한 내가 꾸준히 할 리는 없고, 점점 게을러지고, 제일 즐겨 듣던 프로그램이 중단되고, 듣는 기술이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요즘은 제쳐 두었지만, 유일하게 다운로드 받아놓고 가끔 열어보는 프로그램이 "This I Believe"다. 이거 듣다가 눈물 흘린 적도 여러 번이고, 한때 열심히 들어 그런지 이젠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맘이 따땃~해진다.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나도 이런 거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이 프로그램은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라디오 방송을 2000년대에 NPR이 리바이벌했던 건데, 현재는 비영리조직 (바로가기) 이 계속 하고 있다. 책도 여러 권 나왔고 학교나 마을의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유명한 사람이든 평범한 주부, 회사원, 아이가 모두 '내가 믿는 것' 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하는 이 방송을 들으면서 무하마드 알리, 헬렌 켈러의 목소리도 들어보았고,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였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지만 명사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지탱해주는 게 무엇인가를 들려주는 짧은 글이 의외로 깊은 울림을 남길 때가 많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에겐 이게 일종의 '치유적 글쓰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방송은 자신은 '비틀즈'를 믿는다고 말했던 10대 소녀였다. 가족 같던 개를 잃어버렸을 때 늘 차 안에서 함께 듣던 비틀즈의 노래를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틀어놓고, 개가 노래를 듣고 돌아오리라 믿던 아빠에 대한 기억. 그리고 몇 달 뒤 그 아빠를 잃은 소녀는 지금도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 마치 아빠가 모든 게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위의 동영상은 우주비행사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말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읽은 뒤 우주에서 지구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내 로망 중 하나라서 그런지, 이 에세이도 좋았다. 그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낙관주의를 외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짧은 글이지만 거의 모든 글엔 그걸 쓴 사람의 드라마가 녹아 있다. 이 우주비행사도 우주정거장에서 일하는 동안 어머니를 사고사로 잃었다.
어제 오랜만에 지하철에서 들은 에세이 필자는 '점심시간'을 믿는다고 했다. 겨우 20대에 남들이 평생 거쳐볼 숫자의 직업을 전전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시간만큼은 꼭 지킨단다. 점심시간에 그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편지를 썼고, 사무실 주변을 산책했고, 좋은 사람을 만났고, 웨이트리스로 일할 땐 잠깐 눈을 붙였고, 공부를 했다. "아침식사는 너무 낙관적이고, 저녁식사엔 너무 남을 의식하는 허세가 배어 있고, 점심식사야말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는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간혹 너무 교훈적이고 뻔한 내용들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살아가게 한다고 믿는 것들은 다채롭고 예쁘다. 햇살, 웃음, 단순한 질문의 힘, 권투, 메모.... 나를 살아가게 하는, 사소하지만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은 뭘까 생각하게 된다.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This I Believe (2) | 2012/02/05 |
|---|---|
|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2) | 2011/12/03 |
| 좋은 나라 (4) | 2011/11/06 |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
sanna 2012/02/06 09:26
엥~뭔 말씀이셔.공짜야. 나 어제도 다운로드 받았는데?
위에 링크 건 홈피에서 'listen'메뉴 들어가면 itunes 다운받는 버튼 있음.
-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요즘 힘들다.
인생의 바닥에 처했다고 느낄지 모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로에 서툰 내 맘을 담아 이 노래를 보낸다.
좋은 날이, 웃을 날이 올 거야...우리에게도, 반드시.
Aspri méra ke ya mas (There'll be better days, even for us)
- Agnes Baltsa
I will water the time with my salt tears
짜디짠 눈물로 시간을 적시게 되겠지
I had grown used to spending bitter summers with you.
너와 그 쓰디쓴 여름들을 보내며 자랐으니까
I will come back, don't be sad, say "It's all right",
돌아올게, 그러니 슬퍼하지마, "괜찮아"라고 말해주렴,
There will be better days, even for us.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This I Believe (2) | 2012/02/05 |
|---|---|
|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2) | 2011/12/03 |
| 좋은 나라 (4) | 2011/11/06 |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마주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거예요
그 고운 무지개속 물방울들 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
아무 눈물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있다면
있다면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This I Believe (2) | 2012/02/05 |
|---|---|
|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2) | 2011/12/03 |
| 좋은 나라 (4) | 2011/11/06 |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8월말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어머니가 참여한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타국에 사는 가족에게도 사진을 보여줄 겸 전시회 열리기 전에 블로그에 띄워야지 생각했는데... 게으른 딸년은 무려 한 달 가까이 지난 이제야 쓴다. -.-;;;
어머니한테는 사진을 배우는 대학의 평생교육원 복도에 전시한 것 이외에 화랑에서 제대로 열린 첫 번째 전시회였다. 사진을 가르치는 교수가 이끈 베이징 촬영여행을 토대로 열렸고 전시회 제목은 'Beijing Now'였다. (위의 사진이 전시회에 출품한 것으로 제목은 '북경도심'. 아래의 사진들은 전시회에 출품했던 것은 아니고, 엄마가 찍은 것 중 내가 좋아하는 사진들이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어머니가 쓴 소개 글은 이랬다.
"우연히 사진 갤러리에 들러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자연 풍경을 보게 되었다. 바람까지도 담아내는, 상상할 수 없었던 아름다움과 그 안에 깃든 신비함에 매료되어 늦게나마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는 않으나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도 렌즈를 통해 찾아볼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설렘에 젖는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 한다."
어머니가 사진을 배우신지는 1년이 좀 넘었을까.... 스스로 말씀하신대로 어머니의 사진들은 움직이는 사람, 역동적인 장면을 포착하기보다 흔히들 지나치던 풍경을 멈춰 서서 가만 바라보는 구도를 취할 때가 많다.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불안하게 걸려있는 전선들, 어두워지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 남들보다 일찍 피어버린 꽃송이까지.
어머니가 포착한 풍경들은 대체로 고요히 가라앉은 느낌이지만, 어머니는 활발해지셨다. 평소에 말수도 적고 집밖 출입도 잦지 않던 분이신데, 사진을 시작하면서부터 활동 반경도 넓어지고 새벽 출사도 종종 나가고, 같은 사물을 다른 각도로 보기 위해 심지어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신문사에서 사진 기자들이 좋은 사진 한 장을 위해 기꺼이 땅바닥에 엎드리고 물 속에 들어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감동받은 적이 종종 있었는데, 울 엄니도 그러실 줄이야......^^
보이지 않는 것을 카메라를 통해 보려고 하는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순전히 내가 딸이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괜히 마음이 짠하다. 엄마가 간절히 찍고 싶어하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라도 보기를 원하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내 맘대로 넘겨짚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사진과 함께 엄마는 그림도 그리신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의 그림을 몇 장 찍어 왔다. 그림은 다음 기회에 소개...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This I Believe (2) | 2012/02/05 |
|---|---|
|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2) | 2011/12/03 |
| 좋은 나라 (4) | 2011/11/06 |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지아 2011/09/19 03:21
사진 구도랑 느낌이 차암 좋네요. 맨 마지막 사진은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요. 어머니 완전 멋지신데요? 동생은 어머니께 예술성을 물려받은 듯. 그림도 빨리 올려주세요~~~
-
nabi 2011/09/19 18:11
'그 어머니의 딸' 혹은 '그 딸의 어머니'... 왠지 퍽 친근해진 기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려 한다.
-기꺼이 땅 바닥에 엎드리고...
요 두 귀절이 모녀를 딱 묶은 탯줄처럼 느껴지게 했나봐요.
사진의 느낌, 무척 좋아요. (어머니께도 전해주세요^^) -
-
-
-
후크선장 2011/09/24 15:18
오 멋있습니다.동생분도 전에 사진전 하지 않으셨나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으셨나봐요.222
첫번째의 꽃 사진은 마치 그림같아요. 쵝오입니다.
그런데..사람의 눈으로 볼수 없는 풍경을 어머니는 뭘로 보신건지..제3의 눈?!! 내공이 상당하신듯합니다. 쿠쿠 또 뻘소리를 썼어요 :$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2) | 2011/12/03 |
|---|---|
| 좋은 나라 (4) | 2011/11/06 |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20 |
Trackback : http://www.bookino.net/trackback/375
-
Subject 지저깨비의 생각
2010/12/08 04:42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http://durl.me/42fyz - 이미 놀라운 마케팅 기법은 널려있다? 그것은 적용하는 것은 내가 가진 프레임을 바꾸는 일부터…
A라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고객사 B는 먼 도시에 있다. 어느 날 A가 설치해준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생겼다고 B에게서 연락이 왔다. 보통 이럴 땐 엔지니어 한 사람 보내지만, B가 중요 고객이었으므로 A는 엔지니어 둘을 파견하고 사장까지 날아갔다. 막상 가서 보니 별 게 아니었다. 문제를 쉽게 해결한 뒤 B 사장이 A 사장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감동했습니다.”
칭찬에 쑥스러워진 A 사장이 말했다.
“뭘요. 아무 것도 아닌데요. 우린 늘 이렇게 해요.”
B 사장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좀 이상하다고 느낀 A 사장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 그렇지 않아도 이 도시에 와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야경도 좋고, 음식들도 다 맛있고, 어떻게든 기회가 되면 오고 싶었어요.”
B 사장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A사와의 관계는 이후…….
이거 실제 상황이었다고 한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할 때, 흔히 겸손하고 좋은 말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A 사장처럼 굳이 칭찬을 거절해가며 겸손하고 편하게 대한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다. 내가 베푼 호의가 호의인 줄 상대방이 알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A 사장은 뭐라고 말했어야 할까, 하는 질문에 하수와 고수의 대답은 달랐다. (나 같은) 하수는 “잘 해결되어 다행이다. B사가 저희에게 얼마나 중요한데, 당연히 와야죠”같은 얄팍한 아부성 멘트를 떠올린 반면, 고수(로버트 치알디니)의 대답은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저도 기쁩니다”처럼 프로페셔널의 자부심과 겸손이 동시에 담긴 멘트였다.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가 운영하는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에 다녀오다. 이 워크샵은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가 실전에 적용하는 설득의 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인데 김호 대표는 치알디니 팀에서 인증 받은 국내 유일의 트레이너다.
위에 든 것보다 극적이고 재미난 사례가 많은데 워크샵에 쓰이는 내용이라 내가 여기서 다 까발릴 순 없고, 워크샵은 치알디니 교수가 정식화해놓은 설득의 6가지 원칙, 즉 상호성, 호감, 사회적 증거, 권위, 일관성, 희귀성의 원칙을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자리였다.
참가자들은 기업 대표, 임원들부터 신부님, 소설가, 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설득의 원리에 대한 강의, 참가자들끼리의 토론, 제시된 특정 상황에 대한 팀 사이의 경쟁 프리젠테이션 등으로 진행됐는데 처음엔 '왜 자꾸 숙제를 주고 그래'하고 가볍게 투덜대던 분들도 나중엔 경쟁에 빠져드는 분위기.
사람들이 둘러앉은 원탁마다 미니레고, 색종이, 색색의 나무 스틱들, 작은 고무공들이 놓여있길래 이건 뭔가 했더니 지루할 때마다 부러뜨리고 주무르고 찢고 손장난 하라고 늘어놓은 거라고 한다.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 평소에도 손을 가만 못놔두는 내가 부러뜨린 나무 스틱이 도대체 몇개였는지 셀 수 없을 정도.
설득의 원칙 중 인상적이었던 두 가지만 예로 들면, 첫번째 상호성.
상호성은 모든 문화에서 공통된 원리다. 사람은 받은만큼 준다. 책 "협력의 진화"에서도 다양한 전략을 대결시키는 게임에서 최종 우승자는 처음에 일단 협력하고 그 뒤부터는 받은 대로 똑같이 돌려주는 팃포탯 전략이었다. 이 협력의 방식과 워크샵에서 강조한 설득에서의 상호성 원칙에 차이가 있다면, 상대가 내게 하는 그대로 상대에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라는 것이다. 진부한 천사표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소소한 마케팅 전략에도 쓰일 수 있는 원칙이다. 예컨대 커피빈처럼 10번 펀치를 찍으면 한잔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포인트 카드로 과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펀치를 한번 찍어서 준 포인트 카드와 그냥 새 포인트 카드를 주었을 때 그걸 받은 사람이 다시 와서 커피를 사마시는 재구매율은 앞의 경우가 34%로 뒤의 경우(19%)보다 높았다. 이게 선물과 상호성의 힘인 거다.
주고 답례하는 증여의 원칙에 대한 고전이라 할 "증여론"에서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도 "자발적으로 주는 것"은 "결코 틀릴 염려가 없는 인류의 지혜"라고 말한다. 마오리 족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
"마루(Maru. 전쟁과 정의의 신)가 주는 만큼, 마루는 받는다. 그러면 좋다, 좋다."
포인트 카드의 펀치처럼 선물은 꼭 물건을 뜻하는 건 아니다. 만나서 대화할 때 철저하게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도 선물이다. 둘이 앉아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문자메시지 다 확인하고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문자 답장 보낸다고 정신 없을 때 얼마나 짜증나는지 떠올려보면, 상대방이 내 말에 온전히 집중해주는 태도도 상당히 귀한 선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적 증거의 원칙.
이건 "남들은 다 이렇게 합니다"를 설득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인데, 처음 들을 땐 남들 하는대로 하라며 은근히 다수의 힘을 강요하는 듯해서 시큰둥했다. 그런데 한참 듣다보니 예전에 내가 사용했던 정반대의 부정적 사회적 증거가 떠올랐다.
회사에 다닐 때 전체 기자를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일이 있었는데 마감 날까지 응답률이 10%를 겨우 넘을까말까 했다. 이거 응답하는데 시간이 뭐 얼마나 든다고 이러나 짜증도 나고 한번 더 압박해야 겠다 싶어 전체 메일을 보내 "중요한 조사인데 시간도 얼마 안걸리니까 제발 꼭 좀 해달라. 여태 10%밖에 안했다'고 읍소 내지 협박을 했는데 요지부동이었다. 워낙에 기자들은 비협조적이라 그런갑다 했는데, 워크샵에서 생각해보니 내 설득의 방식이 잘못된 거였다. 나처럼 10% 밖에 안했다고 부정적인 사회적 증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은 '그럼 나도 안해도 되겠네' 하고 받아들인다는 거다. 그걸 긍정적인 사회적 증거로 바꿔내는 것이 고수의 기술이다. 예컨대 정말 몇개 없지만 그래도 들을만한 응답 사례 몇개를 예로 들어 이렇게 좋은 의견들이 나왔다며, 다른 분들도 더 참여해주시라고 말을 바꾼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래도 기자들이 움직일지는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 어쨌건, 나 역시 한창 머리 굵어갈 시절에 부장이 "10시까지 발제 띄우라 했는데 왜 한 놈도 안냈어!"하고 버럭 소리지르면, 정신없이 발제를 쓰다가도 '아, 나만 안낸 게 아니구나'하고 안심하며 저절로 타이핑 속도가 느려졌으니까.^^
교육 한번 받았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이 교육이 내 생각이 달라지게 한 것을 하나만 꼽자면, 설득에 대한 관점의 변화라고 해야겠다.
이전에는 설득이란 상대를 이기고 내 논리를 관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Win-Lose’의 상황이다. 승패의 상황이지 설득의 상황이 아니다. 제대로 된 설득은 ‘Win-Lose’가 아니라 ‘Win-Win’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꺾고 설복시키는 날카로운 논리가 아니라 내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상대의 뜻도 실현되도록 돕는 협력에 더 가깝다. 결국은 설득도 어떻게 사람 사이에 말과 생각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좋은 나라 (4) | 2011/11/06 |
|---|---|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20 |
| 일상의 낯선 풍경 (23) | 2010/03/13 |
Trackback : http://www.bookino.net/trackback/360
-
Subject 지저깨비의 생각
2010/07/19 21:23
커피빈처럼 10번 펀치를 찍으면 한잔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포인트 카드는 펀치를 한번 찍어서 준 포인트 카드와 그냥 새 포인트 카드를 주었을 때 재구매율은 앞의 경우가 34%로 뒤의 경우(19%)보다 높단다.
-
-
지아 2010/07/19 12:34
전 이번 주말에 다큐 프라임 프로에서 작년에 5개 특집으로 내보낸 설득의 비밀이란 다큐를 봤어요. 언니가 말한 내용들이 거의 다 들어 있지요. 한번 볼만한 프로임. 사람 유형별 설득에 대한 내용도 신선했고. 내 것을 관철하는 것이 설득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다시 깨닫게 됐구요. 상대로 하여금 마음을 열고 자신의 말을 할 수 할 수 있게 들어주는 것이 첫 걸음이라는 것도. 하여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프로였어요. 강추!
-
이쁜이 2010/07/19 22:13
애 둘 키우기가 힘들어서 그런가...요즘 남편이랑 계속 냉전인데 저 원칙들 몇 개를 적용해 봐야겠군요...근데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
-
sanna 2010/07/20 23:48
나도 오늘 드러운 성질머리때문에 그 '한 호흡 쉬기'를 못했다가 결국 다시 전화해서 사과하는 일이 있었네....ㅠ.ㅠ
5분만 지나도 그게 뭐 화낼 일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데, 왜 즉각 발끈했었는지 모르겠어. 날이 더워 그런가....
상대가 틀린 점을 조목조목 공격한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왜케 철이 안드냐.....ㅠ.ㅠ
콩국수....맛있겠다. 내일 먹어야지 ^^ 그곳이 더 더울텐데 건강 조심하렴
-
-
UFO 2010/07/20 17:20
흠...그러네..
말 한마디..하나하나...살얼음...
차라리...말 안하고 사는 게 편해^^
실수 할 가능성이 적쟎아..
설득커뮤니케이션은 사회심리학이 기본인데
향학열에 불타는 산나님...봤을 수도 있지만..
독파하시길.. -
-
-
sanna 2010/07/29 22:05
워크샵 트레이너가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그나마 회답온 것 중 참신한 사례들을 예로 보여주면서,
설문조사 참여가 재미있는 일인 것처럼 다르게 소개하니까 5%인가 늘었다고 하더군요.
이 방법이 다른 직종의 사람들에게도 먹힐 지는 모르겠습니다.
-
너처럼 강인할 수 있다면, 너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면,
아니 다른 무엇보다,
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춤추게 만들 수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나 번번이 거절 당하던 유약한 왕자가 꿈 속에서 선망한 백조. 강하면서 아름답고, 가볍게 날아오르면서도 압도적인 힘이 넘치는 사내. 백조는 죽음으로 달려가던 왕자를 가로막아 삶을 향해 돌려세우지만, 사랑을 향해 내밀던 왕자의 손을 조롱한다.
끝내 나는 네가 될 수 없듯, 왕자는 살아서 그가 될 수 없었다. 백조처럼 강해지고 싶고, 사랑 받고 싶었던 유약한 청년의 꿈은 죽음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었다. 이야기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동성애적 코드보다, 내게는 이 무용이 끝내 가닿을 수 없는 대상을 선망하던 자의 비극으로 다가왔다.
백조의 긴 목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꼬고 팔 동작으로 새의 몸짓을 표현할 때마다 두드러지는 근육의 움직임들, 맨발로 무대를 쿵쿵 울리는 발소리, 위협적인 동작을 하며 무용수들이 함께 내뱉던 ‘하!’ 숨소리,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상체.... 이야기의 틀을 새로 짠 것도 신선했지만 매튜 본 각색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 클래식한 레퍼토리를 이토록 황홀한 육체의 향연으로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 뉴욕에서 이 공연을 봤던 동생은 “맨 앞줄에 앉아 무용수들의 땀방울이 객석에까지 튀는 상태에서 봐야 제 맛"이라고 촌평을 했다. 아, 땀방울…. 맨 앞자리 표를 사는 건데. ㅠ.ㅠ
- 공연 시작 전, 차분한 음성으로 흘러나온 LG아트센터의 안내방송이 사람들을 웃겼다. 공연 시작 전에 휴대전화 전원을 완전히 꺼달라는 안내방송을 하면서 이렇게 코멘트.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울리거나 액정의 파란 화면이 깜빡거리는 것만으로도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큰 시련과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모두 와~ 웃으며 '시련과 절망감'을 따라 읊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목적달성은 아주 훌륭히 한 셈 ^^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어머니의 사진들 (12) | 2011/09/19 |
|---|---|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20 |
| 일상의 낯선 풍경 (23) | 2010/03/13 |
| 예쁜 비밀 (25) | 2009/06/07 |
-
지아 2010/05/23 05:26
발레 공연은 호두까기 인형외엔 직접 본 기억이 없는데. ㅠ.ㅠ 아 이거 정말 멋졌겠는데요. 혹시라도 나중에 보게 될 기회가 생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땀방울 튀기는 맨 앞 좌석에서 볼 수 있는 표를 구해야겠다는 각오가 불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Gomy 2010/05/24 10:55
몇 년전 생일에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표 사들고 가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대도 많이 하고 갔지만, 기대에 완전히 부응해줬던 공연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 한편 슬펐지만 한편 남자의 몸이 표현할 수 있는 '역동감'에 감탄했었더랬지요...
-
-
-
DR.Y 2010/07/16 03:03
저도 이 공연 본 경험이 있어요.역시 빌리 엘리엇 마지막 장면을 본 후 오랫동안 동경하다가 드디어 거금 들여서 봤는데 너무 기대를 해서 그랬는지 저는 큰 감흥을 얻지는 못했답니다.
솔직히 내용 이해를 잘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ㅡㅡ
사전에 공부 좀 하고 가서 봐야했었는데 ㅡㅡ;
다시 보면 다른 느낌일까요...? -
DR.Y 2010/07/17 00:21
저 여자예요..ㅡㅡ힝~
아무래도 공연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막연하게 봤던 것 같아요.
엄..근데 평소 취향이 남성적이란 말은 많이 듣는데..;;-
sanna 2010/07/18 00:04
ㅎㅎㅎㅎㅎ 죄송~ 제가 결례를 했네요.
사람마다 감성이 다른 게 당연하지요.
저도 팜플렛 미리 읽지 않았더라면 저 장면이 도대체 뭔 뜻인지 아리송한 상태로 봤을 거여요.
-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NGO가 코카콜라로부터 배울 것 (4) | 2010/12/08 |
|---|---|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20 |
| 일상의 낯선 풍경 (23) | 2010/03/13 |
| 예쁜 비밀 (25) | 2009/06/07 |
| Yes,we can!-감동의 연설 (18) | 2008/11/05 |
Trackback : http://www.bookino.net/trackback/346
-
Subject 당신은 얼마나 많은 눈을 빛나게 했는가?
2010/05/11 02:43
via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sanna)소리를 제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단원들을 다루는 능력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인생이 전환점이라 할 만한 깨달음이었죠.제 교향악단 단원들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되묻기도 합니다.제 일은 다른 이들의 능력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죠.물론 제가 잘하고 있는지 저도 궁금합니다.어떻게 아느냐고요? 사
-
지아 2010/05/11 04:09
음.. 아주 감동적인 비됴네요. ㅎㅎ 마지막에 그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한 말이 젤 가슴에 와 닿는군요.
I'll never say anything that couldn't stand as the last thing I ever say...
이것만 지키고 살아도 좋은 엄마 될듯 ㅠ.ㅠ -
UFO 2010/05/12 15:56
흠..정말 감동이네..그런데 실행이 잘 안돼...
눈빛이 흐리멍텅한 사람들을 어떻게.........@@@
주로 회피하면 속이 편하던데...... -
lebeka58 2010/05/14 11:13
와우 ! 역시 전 산나님의 블로그가 다른 매체보담 훨 세상소통에 월등함을 다시 한번 깨우쳤지요.
세상을 바꾸려는 오직 한 바램의 TED !!! 올려주신 것, 신선하구 & 즐겁구& 감동적이네요.그래서 제이미 올리버 동영상외에 TED 바다에 풍덩하고 있답니다. 글구 울 식구& 친구들에게 산나님덕에
잘난 척하며 퍼뜨리구 있답니당. Ideas woirth spreading!
지붕킥이 끝났다…….
충격적 결말로 인한 놀라움과 동시에 나의 겨울을 함께 견디어준 지붕킥을 보내는 서운함 때문에 오늘까지 마감하기로 약속한 일도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결말에 무척 놀랐고 김병욱 PD가 관습적이지 않은 마침표 찍기에 너무 골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황당하진 않았다. 되레 오래 아팠던 문제들을 건드리는 바람에, 아무리 서운해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마지막 회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이 호의적일 거라고 턱없이 믿었던 아주 오래 전에는, 너무 좋아했던 사람과의 결과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 갑작스러워 황당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그때 ~만 아니었더라면’ 상황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회한으로 가슴에 멍이 들 거라고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런 일들은 일어난다. 안치환의 노래였던가, “인생은 내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는 말마따나 그런 일들을 비켜가도록 세상이 유독 내게 호의적일 까닭이 없다. 기대는 번번이 배반당하고 행, 불행은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그런 비극과 뼈저린 회한을 다소 극적인 방식으로 담았다고 해서 지붕킥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어쩌면 웃음의 소재조차 신분의 차이와 가난, 모진 세상살이에서 찾아온 지붕킥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라면 ‘시트콤스럽지 않은’ 시트콤이라는 게 유일한 문제였을 것이다.
내가 지붕킥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말 병원 입원실에서였다. TV를 보지 않는데다 ‘불구경’류의 일들은 죄다 쫓아다니는 게 직업적 버릇인 기자도 더 이상 아닌 터라, 병원에 5일씩 입원할 일이 없었더라면 지붕킥으로 인터넷이 뒤집어져도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땐 기분이 좋지 않다. 안도감은 잠시 뿐, 춥고 목이 마르다. 몸에 박힌 튜브의 이물감도, 머리가 멍한 상태도 싫어서 신경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TV를 틀었는데, 마침 케이블에서 지붕킥 몇 회분을 한꺼번에 방송하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보다가 키득거리기 시작했고, 정보석이 방귀 때문에 첫사랑과 헤어진 사연에 이르러서는 너무 심하게 웃는 바람에 수술부위가 아파 눈물을 질금거렸다. 그날 이후 낮의 지붕킥 재방송, 밤의 본방을 챙겨보는 게 주요 일과가 되었고, 연말의 스산한 병원 공기에도 별로 우울하지 않았다. 퇴원 이후 예상 밖의 수술 후유증 때문에 한 달가량 집밖 출입을 거의 하지 못했는데, 6개월 전 회사를 그만 둔 ‘심리적 후유증’도 그제야 찾아왔다. 예전 같으면 고민거리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답을 찾겠노라고 발버둥을 쳤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붕킥 다시보기 정액권을 사서 하루에 몇 편씩 몰아 보는 중독자가 되어 그 시기를 넘겼다.
그냥 웃고 싶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볼수록 지붕킥은 그저 웃자고 하는 시트콤이 아니었다. 오르기 힘든 나무를 바라보는 속앓이를 버티어내다 치과에 가서야 겨우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세경도,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정음도 짠했다. 늘 착하고 당하기만 하던 신애가 너무 미운 해리 때문에 인형을 훔쳤다 돌려놓은 것도 안쓰러웠고, 신애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혼내기는커녕 인형을 사다주며 “너는 많은 것을 가진 아이야”라고 말해주는 속깊은 지훈이 좋았다. 아무도 안 놀아주는 심술쟁이 해리가 빵꾸똥꾸 신애가 쓴 동화를 어서 읽고싶어 신애 대신 멸치를 까며 기다리는 모습도, 으르렁거리던 현경과 자옥이 돌아가신 엄마의 콩국수 이야기를 하며 손을 잡던 날도, 짝사랑하던 세경의 손에 35점짜리 영어성적표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저 자신을 쥐어박던 준혁의 수치심도……, 그저 한번 웃고 만 것이 아니라 아, 사람이 저렇게 사는 거지 싶어 마음 짠했던 장면들을 읊자고 치면 끝도 없을 것이다.
성격이 꼬인 탓인지 ‘착하고 맑은 이야기’들을 죄다 싫어하는 터라 지붕킥이 그저 웃음과 감동 일색이었다면 중독에 오래 빠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 돈 하는 엄마에게 대들며 학교 빼먹고 불쌍한 이전 과외선생의 부친상에 관 들러 가겠다고 큰소리치던 정의파 준혁이 제 버릇 남 못주고 늦잠을 자버려 결국 과외선생에게 “이런, 개자식” 소리를 듣듯, 지붕킥의 사람들은 오롯이 착하기만 하지도, 못되기만 하지도 않았다. 약속 못 지키고 의지박약한 데다 치사하고 쪼잔한 인간들이지만, 서로 뒤엉켜 복닥복닥하는 사이 이들은 서서히 변해갔다. 그렇게 그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찡하게 좋았다. 그러다가 나 역시 스스로를 들볶던 문제들을 잊어 버렸던 것인지......, 다시 기운차려 사람들을 만나고 나돌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지붕킥 중독에서 서서히 빠져 나왔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지난 연말부터의 겨울은 내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도 이 시기를 돌이켜본다면 나는 질병과 우울에 괴롭던 컴컴한 기억보다는 눈 빠져라 지붕킥을 보며 따라 웃고 훌쩍대던 시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나와 함께 긴 겨울을 견뎌준 지붕킥.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요, 지붕킥.....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설득의 심리학 워크샵 후기 (15) | 2010/07/19 |
|---|---|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20 |
| 일상의 낯선 풍경 (23) | 2010/03/13 |
| 예쁜 비밀 (25) | 2009/06/07 |
| Yes,we can!-감동의 연설 (18) | 2008/11/05 |
| 런던의 뮤지컬 '빌리 엘리엇' (6) | 2008/07/20 |
-
지아 2010/03/20 04:11
시트콤을 본적이 거의 없어서.. 이것도 사람들이 강추하는데 원래 편수 많은건 아예 시작도 안하는지라 가끔 인터넷에서 소식만 주워 들었거든요. 근데 오늘 보니까 결말 때문에 보던 사람들 다 뒤집어졌던데. 코미디 장르에 대한 기대치를 배신당한 사람들에겐 아무리 감독이 전하려던 메시지가 진지하고 생각해 볼 만한 것이었다 해도 받아 들이기 힘든 것인가 봐요. 마지막 장면에서 쥔공들이 차사고로 죽은것을 복선으로 깔았다던데 ㅠ.ㅠ 전 요새 들마 끊어서 행복해요. 볼 만한게 거의 없고 보면 다 예외없이 시작한걸 후회하면서도 계속 가게 될때가 많아서. 언니 혹시 얼렁뚱땅 흥신소라는 드라마 본 적 있어요? 연애시대(일본 원작 각색) 쓴 박연선씨가 쓴건데 지금까지 제 들마 인생에서 이게 젤 명작이었어요. 요새 갑자기 생각나서 복습하고 있음.. 안 봤으면 강추~~~
-
lebeka58 2010/03/20 11:49
대중 문화가 대중요법이 되기두 한다는 걸 저두 문득문득 느낀 답니다. 머리 속이 복잡한 실타래로 엮여 있을 땐 단순함 한방으루 퇴치되기두해요. 그나저나 건강 잘 챙기시와요. 샬롬~~
-
-
-
동생 2010/03/22 14:16
마감한 뒤 '가판보기' 나오기까지, 딱 30분의 시간 동안 최대의 만족감을 느끼며 할 수 있었던 일이 이제 사라졌어요. ㅠㅠ 마지막회, 어제 출근해 역시 마감 뒤 봤는데 어째 '신세경 귀신설'에 한표 주고싶더라니까요. 오늘 아침 모 경쟁지는 감독 인터뷰, 모 경쟁지는 기자의 눈으로 다 지붕킥 다뤘는데, 이런 한심스러운...우리는 암것도 없잖아! 이런 제길, 했다는...
-
sanna 2010/03/22 14:49
힝~감독 인터뷰했다는 모 경쟁지가 도대체 어디얌~ 읽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네.
감독 인터뷰 찾다가 깨달은 사실. 인터넷으로는 뉴스가 어느 매체에 실렸는지에 무감각해지는데
기사가 넘 이상하거나, 너무 좋거나 하면, 그 다음에야 매체 이름을 본다는 거...
슬픈 일이구먼~
-
-
-
-
엘윙 2010/03/23 23:40
아직도 여운이 남아서 그들의 죽음을 예고했다던 그림이 들어있는 책을 샀습니다.
마지막 휴양지..제목이 섬뜩해서 그런 내용일줄알았는데 완전 동화 같은 책이었어요. 크크. -
EJ 2010/03/25 15:19
저도 지붕킥 팬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이유로 보게 되었네요. 년말에 감기몸살이 겹쳐 골골 앓아눕다 TV에서 보여주는 재방송에 중독되었거든요. 최근 한달은 보질 못했네요. 사순절동안 동영상 재방송 안보기가 제 과제거든요. 그래서 부활절지나 볼까 생각중입니다만. 보진 않았지만 전 끝이 맘에 듭니다. 그냥 끝까지 사람사는 모습을 설탕발림안하고 보여줘서 좋아요. Sanna님도 팬이셨다니 반갑고요, 안보이신 동안 아프셨군요.
-
sanna 2010/03/25 18:38
끝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니, 희귀한 동지를 만난 듯 반갑습니다 ^^
시간 나시면 김병욱PD 인터뷰도 읽어보세요.아래 링크 붙입니다.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people5&a_id=2010032315302213396
-
-
지난 해 예쁜 비밀 전시회를 했던 제 동생 김현경이 올해 개인전을 합니다.
전북 전주시의 갤러리 공유 (063-272-5056)에서 '일상의 낯선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11일 오픈했구요. 3월31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개인전은 지난해 우연히 참여한 그룹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을 눈여겨본 갤러리의 초대로 열리게 됐습니다. 지난 해에도 매일 보는 창밖 풍경에서 예쁜 비밀을 건져내었던 제 동생은 올해에도 그 연장선 상에서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매일 보는 담벼락" "매일 가는 밥집의 작은 화단"에서 그가 찬찬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건져올린 화사한 풍경들입니다.
아래의 그림 "103호 앞 2"는 아파트 앞의 볼품없는 화단에 피었던,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들꽃이구요.
문외한인 저의 주절거림 대신, 아래 '작가의 말'을 붙입니다. 혹시 이 블로그에 들르시는 분들 중 전주나 인근 도시에 사시는 분들이 있다면 한번 놀러가보세요. 갤러리가 전북대학교 앞 번화가에 있지만 작고 소담한 정원, 카페가 함께 있어서 호젓한 느낌을 줍니다. 가까이 계시는 분들은 봄의 햇살과 잘 어울리는 제 동생의 그림도 보고 차 한잔 하는 나들이를 계획해보세요~. ^^
작가의 말
생물학적 개념 중에 ‘역치’라는 말이 있다.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이르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역치가 없다면, 오감이 느낄 수 있는 것마다 모두 반응을 나타낸다면 너무나 피곤해서 생산적인 것에 신경 쓸 수 없는 미개한 인간으로 남거나 세세한데 모두 신경 쓰다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생물학적 본능이 그렇게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상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간혹 사진기를 들이대기만 하면 쓰레기통조차 그림이 되는 타지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곳 주민들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그토록 아름다운 그들만의 환경이 그들의 '역치'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한다. 어쩌면 예술가들은, 역치가 낮은 사람들이 아닐까. 남들은 지나치는 일상에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감탄하고, 화내고, 의미를 캐는 사람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삶이 힘들지만 그러면서도 더 아름답고 역동적인 '삶'을 가깝게 느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오감이 무척 예민한 편이다. 시각 뿐 아니라 듣기도 잘 듣고, 냄새도 잘 맡는다. 좀 덜 느낄 수 있으면 덜 피곤할 텐데…라고 바랄 때도 많지만, 싫지만은 않다. 주변에 늘 있지만 내가 먼저 발견해 내는 것, 혼자서 느끼게 되는 무언가가 있을 때는 내게만 주어진 어떤 비밀스런 선물 같아서 감히 불평은 못 할 것 같다.
일상이 무미건조할 때, 멀리 떠나는 것도 좋지만, 예술가처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가끔은 사시사철의 변화가, 작게는 매일의 날씨 역시 일조를 하는 것 같다. 늘 보던 나무에서 못 보던 꽃이 피고 지고 하니까. 스스로의 역치를 조금 낮춰서 보면 매일 보던 담벼락도, 매일 가는 밥집 앞의 작은 화단도 너무 화사하고 새로워서 눈물이 찔끔 혹은 미소가 살짝 날지도 모를 일이다.
'보고들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12) | 2010/05/23 |
|---|---|
| 누구라도 음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 (6) | 2010/05/11 |
| 잘 가요, 지붕킥 (20) | 2010/03/20 |
| 일상의 낯선 풍경 (23) | 2010/03/13 |
| 예쁜 비밀 (25) | 2009/06/07 |
| Yes,we can!-감동의 연설 (18) | 2008/11/05 |
| 런던의 뮤지컬 '빌리 엘리엇' (6) | 2008/07/20 |
| 서울 속의 브라이 (19) | 2007/08/20 |
-
EJ 2010/03/14 00:49
축하드립니다. 오늘 미사때, 신부님께서 3월이지만 아직 봄을 "찾아야만" 느낄 수 있다는 얘길 하셨는데, 동생분 그림도 그 "찾는 눈"을 가진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작품들 인 것 같네요. 전주에 사는 친구에게 이 포스트를 전달해주어야겠네요.
-
지아 2010/03/14 06:21
작년에 한국 갔을때 전주에서 공유에 자주 갔었는데... 저의 집이 바로 그 옆이거든요. 거기서 전시를 하는군요. 아 보고 싶다. 저도 역치는 무척 낮은편인 것 같은데 현경씨처럼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없어서 ㅋㅋㅋ 그림 좋네요..
-
-
사복 2010/03/14 16:18
지난 번 전시회 때, '다음 전시회는 꼭 끝나기 전에 알려주세요!'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뿔싸, 전주로군요..;; 어쿠야;;
가보기에는 너무 멀어서.. '역치가 낮은' 그림들을, 그리고 그만큼 예민하고 예쁘게 와닿는 글을, 대신 보고, 대신 읽고 갑니다...
산나님 동생분, 전시회 축하드려요.. ^^* -
-
lebeka58 2010/03/15 08:41
전주를 내 생애 두번째 방문할 기회인가 생각이드네요, 학교때 답사여행으루 딱 한번 가본 곳이거든요, 마침 동생이 전북대 수업이 있는 날 겸해서 찡겨 내려가 그림보구 와인마시면서 역치 좀 낮춰볼까해요.
-
엘윙 2010/03/15 22:41
들꽃도 클로즈업하면 저렇게 화려한거군요.
전시회 제목처럼..일상인데 역치를 낮추면 신기하고 낯선 기분입니다.
미술학원을 두달째 다니고 있는데..연필로 도형그리다가 지쳤지 뭐에요. ㅜ_ㅠ -
마음산 2010/03/20 23:06
아하, 이런, 전주라니! 어떻게 단체 관람을, 봄소풍 삼아...
산나님은 '그림 읽어주는 분'으로 무조건 '또' 가시는 것으로,
추진함해보면 어떠실지...(단체란 몇 사람 이상인 건지 모르지만^^)
'102호와 103호 사이' 인상적입니다.
담쟁이의 꿈은 달까지 이르는 거라는데...-
sanna 2010/03/20 02:00
눈에 잘 띄지않는 담벼락에 달라붙어 그런 꿈을 꾸다니,
앙큼한 것들이로군요! ^^
전주에 단체관람 못가면 서울에서 단체 밥이라도 먹지요. (단체란 2인 이상입니다 ^^)
-
-
-
lebeka58 2010/05/14 11:48
봄비를 맞으며 그야말로 오랜만에 전주에 갔었지요. 갤러리 <공유>에서 평밤한 일상에서 놓치고 사는 것을 작가의 시선으로 건져 풀어 놓은 작품 감상 잘 했지요. 작품 곳곳에서 디자인적인 요소가 살짝 살짝 엿보이면이 재미있더라구요. 글구 저두요 매일 매일 일상에서 감탄하고 살아야겠단 생각으로 살고 있답니다. '내 나이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Prev

Rss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