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자는 것’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나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구절이다. 이 말은 책 속에서 비슷한 말들로 여러 번 변주된다.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 ‘버티면 버티어지는 것이고 버티지 않으면 버티어지지 못하는 것’, ‘삶의 자리는 성 밖에 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비슷한 말들이 침략국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관료의 입에서도, 얼어 죽는 군병을 살려야 할 때 종친의 옷이나 챙기는 관료의 입에서도, 침략국의 앞잡이가 되어 항복을 강요하는 통역관의 입에서도 흘러나온다.
‘당면한 일’을 어떻게 당면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 말들이 난무할 뿐 등장인물들의 성격적 차이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입과 속말을 통해 작가 김훈의 목소리만 집요하게 들려온다. 김훈의 일인다역 퍼포먼스를 보는 듯한 소설이다. 모든 소설이 결국은 작가 목소리의 반영이겠지만, ‘남한산성’은 그 정도가 좀 심하다.
견딜 수 없는 걸 견딜 것인지 말 것인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대군이 에워싼 남한산성에 갇힌 신료들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의 핵심이었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척화파와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다’는 주화파의 대립. 이는 대다수의 우리가 겪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높이 세운 목표와 이상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산다는 건 목전의 현실적 어려움을 계속 해결해나가는 과정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가.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은 어느 편도 아니고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라고 썼다. 이 책은 그렇게 굴욕을 감수해가며 밥벌이의 괴로움을 견디어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다.
책 속에서 저자의 애정을 듬뿍 받는 캐릭터들은 척화파도, 주화파도 아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복무하는 수어사 이시백, 대장장이 서날쇠다.
이시백은 “한번 싸움에 하나를 잡더라도, 하나를 잡는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성은 무너진다”고 부하들을 독려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이시백의 대답은 저자가 서문에 쓴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라는 말과 오버랩 된다.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묘한 공감과 반감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책이다.
공감은 비굴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체념의 정서에서 우러나오고, 반감은 비굴함의 합리화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다. 서로 안 쓰려고 피하는 항복문서를 최명길이 자임해 쓰는 대목에서는 김훈이 80년대 초반 신문기자시절 아무도 안 쓰려던 용비어천가를 자신이 도맡아 썼다고 말했던 인터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태도일까. 선뜻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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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2007/11/05 02:44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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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남한산성 - 김훈
2008/08/22 22:21
잘 살아 보세 - 민들레처럼 이것이 이 책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 아닐까 합니다. 삼전도의 굴욕도 있고, 주전과 주화의 말(言) 먼지도 있고, 서날쇠의 지혜로움과 나루의 생명력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의 주제를 "잘 살아 보세"로 이해했습니다. 인조 14년(1636년 12월) 말(言) 먼지가 일고, 군량과 더불어 시간이 말라가는 곳, 그 곳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남한산성에 임금이 있고, 체찰사로서 난국의 해결을 시간에 맡기는 영의정 김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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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치욕의 한계, 삶의 한계,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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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가장 위대한 책중 하나인 대학에는 '머물 데를 알아야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야 고요해 지고, 고요한 뒤에야 편안해지고, 편안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를 해야 능히 얻는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 모든 처세, 성공학, 자기개발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2,500년전 동양의 선철들은 깨달았다. 모든 것은 머물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물의 理에 머물러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知止而后有定 定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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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남한산성 - 난해한 나라 조선을 이야기하다
2008/09/29 13:15
난해한 나라로구나... 갇혀있는 조선의 국왕이 죽어가는 나라 명을 향해 춤으로 예를 올림을 보며 칸은 말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는 아니였지만,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던 청을 조선은 굳이 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칸을 이 후미진 땅으로 불러들였다. 조선에 올 때는 시원한 싸움이라도 한판 기대했건만, 남한 산성에 도착할 때까지 저항도 환영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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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인 문장을 읽는 즐거움 작가 김훈의 문장은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호흡이 긴 문장이 많고 요즘엔 낯선 옛 낱말들을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지 않으면 읽고도 뜻을 알지 못하기 십상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상관없이 무심하게 펼쳐지는 풍경 묘사는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을수록 소설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을 일깨웁니다. 김훈 소설의 큰 매력 중 하나입니다. 동시에 아주 간결한 문체 또한 작가의 장기입니다. 힘이 넘치고 묵직한 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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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김훈의 남한산성
2009/01/28 16:18
옥토씨는 영화볼때는 좀 덜한데 유독 책을 읽을때는 스포일링을 조심한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리뷰를 접하지 않은 채 호기심을 가득 안고 시작했다. 책장을 넘겨가며 가장 먼저 한문장 한문장이 아주 정성들여 쓰여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남한산성의 소설적 배경을 독자의 눈앞에 펼쳐보이려는 듯 깊이 있고 어렵지 않은, 옛스러운 표현이 가득하면서도 곧은 문장으로 시종일관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난 느낌은 마치 잘 만들어진 한 접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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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그니 2007/08/14 00:49
저는 칼의 노래를 읽었을때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진짜 이순신이 생각했던 것이 이것이었을까. 남한산성도 그런 느낌이 좀 드네요. 그래도 평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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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처 2008/08/22 22:21
그러고 보니, 최명길과 김상헌이 다른 듯 같은 면이 많은 것이 그래서인가 봅니다.
저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래서 다른 분들의 글을 많이 읽으러 다녀야 하나 봐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
sanna 2008/08/22 23:06
ㅎㅎㅎ 이 책의 주제를 '잘 살아보세'로 그려내신 로체님 글 읽고 미소가 떠오르는군요. 맞아요. 거의 모든 책들의 주제가 사실은 그거죠. 잘 살아보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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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아르 2008/09/29 13:25
칸이 보낸 문서의 내용이 정말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동족을 향한 김훈의 바른 소리인가 궁금해지더군요. 저는 후자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김훈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저도 적은 서평이 있어 트랙백 걸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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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키노 2008/10/12 12:31
트랙백 잘 받았습니다. ^^ 제 블로그 댓글에도 썼고, 위의 쉐아르님 말씀도 있지만, 확실히 '작가의 목소리'에 대한 지적은 적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산성에 대한 포스트를 많이 읽어봤는데, 이에 대한 지적은 이 글이 처음인듯... 그래서 sanna님 블로그를 구독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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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to 2009/01/28 16:18
잘 읽었습니다. 저는 김훈의 다른 소설을 아직 못 읽었는데 (사실 책을 잘 안 읽습니다;
독서내공이 없어서 그냥 읽기만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잘 정리가 안되어 다른분들의 논평을 읽어보고 있는데, 작가에 대한 글은 이 글이 처음이네요. 아울러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기도 하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 남자, 쓸쓸하다….
김 훈의 소설집 ‘강산무진’ 책장을 덮으며 중년 남자, 아니 중년의 삶이라 해도 좋을 그 목숨의 쓸쓸함이 입 안에서 서걱거린다.
힘들어도, 아파도, 아얏 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은 채 그들이 묵묵히 감당하는 삶의 무게가 내 어깨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등으로 아픈 기운이 번진다. 고단한 그들….. 허무한 세상을 묵묵히 감당하며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등을 쓸어주고 싶다.
한 남자가 있다. 이혼하고 혼자 사는 50대 후반의 기업체 임원. 어느날 느닷없는 간암 판정을 받는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망 선고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뭘까…. 은행에 가서 적금을 해약하고 아내에게 못다 준 위자료를 전달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식을 처분하는 등의 일상 생활 정리이다. 표제작 ‘강산무진’에서는 오열이나 절망보다, 그가 그렇게 말없이 하루하루 뭔가를 정리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비정한 일상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화장’에서 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참담한 몸과 싱싱하게 피어나는 여직원의 몸에 대한 은밀한 상상을 교차해 전개하는 대목을 읽을 땐 약간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죽어가는 아내의 참혹한 몸에 대한 상세한 기사체의 묘사, 회사 여직원의 몸에 대한 주인공의 동경과 환상을 묘사할 때의 꿈결 같은 문장이 대비를 이루며 비루한 현실- 판타지 사이의 묘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엔 아내의 상중에도 여름 화장품 광고 시안을 결정해야만 하는 주인공이 있다. …살아가는 일이란 그런 것일 게다. 아무리 참혹한 일을 앞에 두고도 사소한 결정들을 해야 하고, 꾸역꾸역 밥을 먹어야 하는.
읽을 땐 건조한 느낌이었는데 책을 덮은 뒤 인상 깊은 단편은 ‘항로표지’다. 대단한 기대도 없이 섬을 떠나는 등대지기, 그리고 인생유전 끝에 등대지기로 흘러 들어오는 또 다른 사람.
흘러가고 흘러오는 사람들은 지향점도 없어보이고 인생이 격렬하지도 않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묵묵히 견딘다. 마치 그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라고 말하는 듯…
나는 이 책을 명상단식 캠프에서 틈틈이 읽었다.
과거의 나를 벗고 새롭게 거듭나고 싶은 욕망에 달려간 곳에서 읽기엔 지독하게 쓸쓸한 책이었지만, 이 책 덕분에 어떤 균형감각 같은 걸 얻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균형감각이라고 해봤자 대단한 건 아니고, 뭔가를 새로 시작한다고 해서 지나치고 들뜬 감상, 무작정한 기대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수 있도록 인생의 다른 면을 잊지 않는 자각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생활과 사고의 다른 습관을 몸이 기억하도록 새겨넣겠다고 애를 쓰는 순간에도, 살아간다는 일이 다만 끝없는 체험의 연속일 뿐인 걸 뭘 더 바래, 하는 심정으로 마음이 때로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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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그니 2007/02/05 02:27
지금 제가 읽으면 딱 모든 일을 손에 놓기 쉽상이겠군요. 김훈 첫 소설집...
칼의 노래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저는 두번 손이 안가던데.
암튼 이 책도 읽고 싶어집니다.ㅎ -
inuit 2007/02/05 22:24
아.. 제가 요즘 중년의 센티멘털을 느끼는 중인데 -_- 이책을 읽으면 도움이 되려나요. ^^;;
무소유와 길떠남의 대체경험이 될 듯도 하고, 삶이 그냥 시들하게 느껴질듯도 하고..-
susanna 2007/02/05 23:47
음....그게 센티멘털의 정도에 따라 다를 것같습니다. 심각하지 않다면 좋은 대체경험이, 심각하다면 무릎이 푹 꺾이고 난데없는 눈물이 날 수도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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